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더니 역시나 질버만이 머리 속에서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는 구절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흔히들 삶이 튼튼한 토대가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있는 것 같을 때 머리 속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 막상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 위기에 부딪혀버렸을 땐 사람이 한없이 차분해지면서 초인적인 힘이 생기거나 묘안이 떠올라지는 반면, 폭풍 전야일 때는 자아가 쪼그라 들어 시야를 저멀리 두지 못하는 겁쟁이가 된다. 이게 바로 예지력은 없는 대신 상상력은 부여받은 인간이란 존재의 한계점이 아닐까 싶다.
미래를 볼 수 없어 운명이 무엇일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수용소로 잡혀가는 결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벌써부터 상상은 간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일까 저것일까. 이 사람은 믿어도 될까. 아무도 믿지 못한다면 최악은 피하기 위해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질버만은 그 어떠한 생각에도 안심할 수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차라리 어떻게 하라고 명령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결론이 나버렸으면 마음 편하겠다는 그 생각에 질버만과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내 불안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구나 그 무게를 실감했다.
이런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하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이 책은 성공작이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의심케 하는 수많은 세계 2차 대전 관련 작품을 보면서 우리나라에게 일본이 그렇듯 그 시대의 독일은 나에게 절대 악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 악에 주목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느라 유대인의 삶에 스며들어 진정으로 공감해본 적도 할 새도 없었다. 절대적인 힘에 의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박탈 당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현대 사회 속 우리의 삶과도 맞닿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원초적인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질버만이라는 인물에 동일시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독일의 아픈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