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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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올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저

꽤 두꺼웠던 책이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은 없었다. 당시 독일의 잔혹함을 수면 위로 드러내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도 유대인의 절절한 스토리가 가슴을 아프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설은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되는 급박한 순간에서는 설명을 최소화했고,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체포 장면에서 이야기를 툭 끊어 버리고 책을 덮게 만들었다. 어릴 적에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나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를 다 보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에 총 맞은 듯한 심리적 고통과 환멸을 느끼던 것에 비하면 이 책이 주는 충격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다만, 그동안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감히 공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던 1930년대 그 시절 유대인들은 당시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 파장이 그들의 일상을 어떻게 서서히 무너뜨렸는지는 생각보다 더 짙고 은은하게 나에게 여운을 남겼다. 그 사람들이 이랬겠구나, 나도 그 기분 뭔지 알지 하고 반응을 해도 될지 사실은 아직도 조금 조심스럽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던 세상이 더 이상 나의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을 것 같을 때 모든 걸 의심해야 하는 그 기분이 뭔지 알기에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와닿았고, 더 진실되게 그들의 입장에서 춥고 매정했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내는 얼마나 불안할까. 당장 편지를 써야겠어. 아내가 기독교인이라서 정말 다행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는 비록 걱정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아내는 무사하니까. 그러다가 여동생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고, 체포된 매제 귄터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그는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하지만 인간이란 결국 잔인한 이기주의자니까.

139쪽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더니 역시나 질버만이 머리 속에서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는 구절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흔히들 삶이 튼튼한 토대가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있는 것 같을 때 머리 속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 막상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 위기에 부딪혀버렸을 땐 사람이 한없이 차분해지면서 초인적인 힘이 생기거나 묘안이 떠올라지는 반면, 폭풍 전야일 때는 자아가 쪼그라 들어 시야를 저멀리 두지 못하는 겁쟁이가 된다. 이게 바로 예지력은 없는 대신 상상력은 부여받은 인간이란 존재의 한계점이 아닐까 싶다.

미래를 볼 수 없어 운명이 무엇일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수용소로 잡혀가는 결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벌써부터 상상은 간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일까 저것일까. 이 사람은 믿어도 될까. 아무도 믿지 못한다면 최악은 피하기 위해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질버만은 그 어떠한 생각에도 안심할 수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차라리 어떻게 하라고 명령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결론이 나버렸으면 마음 편하겠다는 그 생각에 질버만과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내 불안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구나 그 무게를 실감했다.

이런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하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이 책은 성공작이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의심케 하는 수많은 세계 2차 대전 관련 작품을 보면서 우리나라에게 일본이 그렇듯 그 시대의 독일은 나에게 절대 악 그 자체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 악에 주목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느라 유대인의 삶에 스며들어 진정으로 공감해본 적도 할 새도 없었다. 절대적인 힘에 의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박탈 당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현대 사회 속 우리의 삶과도 맞닿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원초적인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질버만이라는 인물에 동일시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독일의 아픈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드맥스'처럼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끝없이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는 플롯의 서사를 읽을 때 작품이 의도하는 불안감과 불쾌감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편이다. 이 책 역시 가장 마음이 편할 곳이 이동 중인 기차라는 점에서 그 시대 독일이 유태인들에게는 정말로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둘 집도 가족도 잃어버린 채 떠돌아다니는 질버만과 그런 인물에 투영된 작가의 모습이 참 고달파 보였다.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상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간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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