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라 그래 (양장)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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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읽고 나서 그 글을 쓴 사람을 무척이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책장을 넘기고 마음이 저릿해지는 구절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행여 내가 그 구절이 간절히 다시 필요해질 때가 생길까 책의 모서리를 더 빨리, 더 자주 접어갈 때쯤 양희은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연예인이 쓴 에세이가 다 그렇지 뭐 라는 꽤나 견고했던 편견에 강한 의심을 품게 만들어준 책이다. 한 분야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탈 없이 머무른 사람은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배울 점이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남들이 나의 상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모든 것들을 버티고 여기까지 온 나 굉장히 대단하지 않냐며 은근히 뽐내는 그런 속보이는 내용이 아니다. 활자 사이 사이에 그저 작가의 마음이 너무 잘 드러나 있어 나의 민망하리만큼 짧은 인생 동안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굳게 먹어두던 나름의 다짐들이 책 앞에서 보자기 풀어지듯 훌훌 녹아내려 없어지고 말았다. 기대를 안해서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걸까 나는 이 책을 펼치고 첫 장을 다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카페에서 친구들이랑 공부하다가 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떠드는 친구들 뒤에서 문학소녀 마냥 걸으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나답지 않은 일이다.

고백하건대, 별나게 겪은 그 괴로웠던 시간들이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보탬을 주면 주었지 빼앗아간 건 없었다. 경험은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 따지고 보면 '결핍'이 가장 힘을 주는 에너지였다. 이왕이면 깊게, 남과는 다른 굴절을 만들며 세상을 보고 싶다.

109쪽

언젠가부터 세상이 미워지고 내가 안쓰러워지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갑자기 문을 두드려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되었다. 예전처럼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술의 힘을 빌려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무턱대고 나는 괜찮다며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나를 언제까지나 지탱해줄 수 없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을 때 나는 감사하게도 오히려 내가 가진 슬픔이 나를 빚어낸 거구나, 그게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더 강해질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일종의 구원과 같은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기원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상 속에서 자잘하게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우울이나 무기력을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 안에 처리하기에 딱 좋은 나만의 무기로 틈틈이 잘 활용되고 있다.

그래도 가끔 이유 없이 단단했던 멘탈이 말랑해지고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나를 진정으로 알아줬으면 할 때가 다시 돌아오면 여전히 그 무게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항상 낯설고 새롭다. 내가 그동안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던 건 아닐까 자신감이 뚝 떨어지고 힘들게 힘들게 쌓아 올려놓은 나의 세계가 덜컹 하고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수많은 그런 약한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너지지 않을 듯 굳세어 보이는 양희은도 확신에 찬 순간까지 오기에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게 나한테 어찌나 큰 위로가 되던지. 24살 어린 나이에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대 차이가 나는 분의 말에 이렇게까지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젠 그만 불안해 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털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상처, 비슷한 아픔 앞에 서면 차라리 가벼울 수도 있는데...... 상처는 내보이면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또 비슷한 상처들끼리는 서로 껴안아줄 수 있으니까, 얘기 끝에 서로의 상처를 상쇄시킬 수도 있다. 같은 값을 지워나가듯 그렇게 상처도 아문다. 왜 상처는 훈장이 되지 못하는 걸까? 살면서 뜻하지 않게 겪었던 아픔들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어떻게 아무런 흉도 없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제 겪은 만큼'이란 말이 있다. 나는 내가 가진 상처 덕분에 남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한 눈과 마음이 있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130쪽

한때 양희은을 힘들게 하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가진 아픔을 먼저 꺼내고 나누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의 유약한 모습이 누군가의 마음을 깊숙이 건드려 각자 꽁꽁 숨겨두던 고민거리를 털어놓게 만들어냈을 때,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우리가 숨 돌릴 구석이 하나 쯤은 있구나 하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때 나는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인류애를 느낀다. 어쩌면 그런 관계 속에서 기운을 받는 이런 순간들이 모여 우리 모두 조금씩 강해진 거겠지. 서로에게 솔직해지고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과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양희은의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유독 특별해진 건가 보다.

늘 담백한 냉면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다. 함께 살아갈 친구들도 냉면처럼 단순하게 꾸려가고 싶다. 이 사람 저 사람 필요 없이 나를 알아주고, 마음 붙이고 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명이라도 충분하다. 고명 하나 없는 냉면처럼 나의 일상도 군더더기는 털어내고 담백하고 필수적인 요점에만 집중하고 싶다.

176쪽

젊은이 중에서는 아이유를, 확실히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들 중에선 김이나와 이효리를 닮고 싶다는 동경을 품으며 살아왔다. 나이가 지긋이 먹고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딱 양희은의 2/3만큼만 따라가도 후회 없이 늙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진 능력이 그렇게 많은데도 담백한 모습만 보여주는 그들처럼 겸손하고 진실되게 살고 싶다. 그러려면 부끄럼 없이 모든 걸 드러낼 수 있게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까마득하지만, 따라갈 만한 길이 내 앞에 하나 더 그어졌다는 생각에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놓게 된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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