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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평점 :
#도서제공 #서평
미서부에 산업화가 스며들기 시작한 시기, 아이다호의 한 남자의 삶을 그린 <기차의 꿈>은 제목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익숙한 감동 서사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소설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도시에 익숙한 독자로서 소설 속에 묘사된 광활한 야생 숲의 규모와 느낌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대배경이 지금과는 상당히 먼 탓에 자연스럽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특히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와의 정서적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삶의 충격적 사건들 역시 훌훌 흘려보내듯 서술한다. 게다가 소설 전반에 몽환적인 인상을 주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신화적 장면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과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소년은 뒤통수가 척추에 닿을 때까지 고개를 한껏 젖히고, 목구멍을 열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소리가 극장 안에서 낮고 무섭게 생겨났다. 발밑에서 바람이 우르릉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한데 모여 포효처럼 변하더니 사람들의 청각 그 자체를 쪽쪽 빨아들여 목소리로 변했다. 그 목소리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마침내 사람들의 뇌 속으로 침투해서 계속 높이 올라가며 점점 더 끔찍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배의 경적 소리, 기관차의 외로운 기적 소리, 오페라 가수의 노랫소리, 플루트 소리, 계속 신음하는 것 같은 백파이프 소리 등 비슷한 모든 소리의 출발점인 이상적인 소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이 되고, 시간이 영원히 사라졌다. p.131
작가가 인물과의 거리감을 의도한 것이라면 굉장히 효과적이다. 독자는 그레이니어와 감정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그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정말 생소한 경험이다. 자연이 자기 자리에 존재하듯 그레이니어 역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배경에 가까운 존재로 느껴진다. 슬픔도 고통도 이겨내기보다는 묵묵히 견뎌낸다. 이러한 서사 방식은 인간의 삶을 자연과 시간의 흐름 속에 작디작은 존재로 표현하려는 독특한 글쓰기라 느껴졌다.
‘작가들의 작가’로 통하는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이 많은 찬사를 받아온 이유는 이러한 거리감에서 비롯한 인간의 고독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 역시 세상과 인물의 거리감을 부각시킨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인생사가 담긴 묵직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지금의 나에게 이 작품은 아직 낯설고 어렵다. 언젠가 인생을 더 살다가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이 거리감이 오히려 깊은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나서 바로 영화를 이어봤다. 초반부 맑게 갠 듯한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나를 압도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야생의 숲과 다채로운 하늘의 색, 치솟는 불길과 휘몰아치는 연기가 너무도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분명한 것은 내가 자연을 그려내는 상상력이 부족한 서울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화면 속 그레이니어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달리 그에게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소설과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게 한다. #기차의꿈 #데니스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