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 세계사 시인선 107
송재학 지음 / 세계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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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슴속에 자신이 만든 덩어리를 안고있다. 어떤 이는 마음속에 절(寺)을 짓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커다란 바위를 만들기도 한다. 그 흔적들은 살면서 부대낀 세계와의 마찰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생기기도 한다. 송재학시집 <기억들>에서 보이는 황무지의 이미지 또한 이러한 이력들이 만들어낸 무늬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있기 위해 필요한 몽리면적을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사막은 자꾸 넓어져야 한다/ 선인장의 뾰족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앎은/ 각주가 많은 흉터이다
-<황무지로의 접근> 中에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계의 문법을 체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험한 싸움인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바라는 자신의 황무지는 단순히 황폐함이나 방임을 뜻하지 않는다. 바람만 손님인양 들리는 그곳에는 생명이 있다. 중국대륙의 젖줄인 황하와 장강의 발원지 또한 황무지인 것이다. 시인은 황무지가 가진 이러한 속성을 찬양하며 이런 말을 한다.

제 안에 놀라움을 숨기려면 무엇보다 몇천년은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바람만 찾아와서 머무는 곳, 귀기울이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의미없는 아지랑이 같은 고요, 손바닥을 슬쩍 허공에 부딪쳐보는 고요의 간이역을 황무지라 부르겠다
-<황무지란 바람을 숨긴 이름이기도 하다> 中에서

자신을 비워야 큰 것을 담을 수 있다는 논리. 시인은 세기의 음담패설과 제 속의 불신 증오들을 비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선을 속내로 돌려 '내 안쪽의 수용소 같은 어둠'을 지켜본 후 '나에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다에 행구어' 보기도 하고 '내 안으로부터 그 소리의 덩어리를 제발 밖으로 끄집어내 달라고 애원'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 덩어리들이 터져 나올 때 그는 무지막지하게 튀어나오는 그 무서운 것들에 당황하며 성급히 그것들을 수습하려한다.

나는 지금 많은 피를 흘렸다 나를 꿰매다오 창자가 터지고 복수가 흘러나온다 더 무서운 것들이 나오면 어쩌나 나를 닫아다오 알 수 없는 익명의 육체가 꾸역꾸역 나오면 다시 뱃속에 집어넣을까 나를 꿰매다오 먹는 것과 뱉어내는 것은 삶의 반대쪽이라는데 작은 창자는 어둡고 긴 터널이라는데 텅빈 뱃속에 다시 무엇이 채워지려나 그 속을 보지마라 어서 입구를 꿰매다오…중략…이것은 악몽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집어삼킨 자루를 묶는 방법이다
-<자루를 묶는 방법> 中에서

그는 성급히 자루를 묶었다. 구토에 가까운 감정표출로 낭패를 본 그는 그 덩어리들을 분출하기 위해 더 적확한 방법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닿은 곳이 제주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바람의 갈퀴로 제 안의 응어리들을 긁어내는데 성공한다.

바람이 가진 갈퀴 손가락도 아름답다고 말해주고싶다 제주 산록에서 온몸을 드러내면 그렇다 발서슴하는 바람은 연달아 터지는 폭죽의 뇌관을 내 몸에 장치한다 두려운 것은 문득 바람의 힘이 폭풍주의보를 빌려 한꺼번에 몸의 중심을 뻥 뚫고 지나간다는 느낌, 내 몸은 이제 출구와 입구가 생겨 이것저것 꺼내고 집어넣을 수 있다 자세히 보니 십이지장 아래쪽 구릉이 가렵더니 이미 구름체꽃 군락이 터를 잡으면서 점점 넓어진다
-<風化-제주시편> 전문

시인에겐 이제 바람이 훑고 지난 자리마다 '텅빈 허공이 생겨서 좀씀바귀마다 꽃이 피게' 할 수 있으며 '내 입김 안에 빈터가 있으니 어서 기둥부터 세워라'며 호령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나의 왕오천축국전>이란 시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황무지가 수십 수백년 지나도 싹을 틔우는 보리수 염주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길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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