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해방의 괴물 - 팬데믹, 종말,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철학적 사유
김형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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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포스트잇을 쓰게 한 책. 처음부터 끝까지 쫀득하니 재밌다. 라캉에 하버마스, 아도르노, 니체, 바디우, 아감벤, 레비나스, 들뢰즈, 스피노자까지 남자 현인들의 이야기가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도 큰 미덕이고, 현실의 흐름을 반영한 각종 영화, 드라마 분석까지 흥미진진한 내용이 가득이다. 우리가 지독하게 겪어야 했던 팬데믹을 거쳐 유토피아까지 검토한 후, 종말을 사유하는 것이 미래를 개방하는 일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까지 뭐 하나 버릴 논의가 없다.

​저자는 우리가 재난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빼앗겼다고 한탄하지만 사태의 본질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즉 우리는 이미 평범한 재난들로 가득한 이상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근히 이해되지 않음? 오래전에 이미 망가져버린 이상한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가시화된 결과물이 지금의 재난이라는 것이다. 게다 재난은 우리의 일상을 환기하고 세계를 낯선 공간으로 다시 돌보게 만든다. 그러니 이제 일상이 회복된다고 먹고 마시고 놀자는 향락 부추김에 빠져들 이유도 없다. 일단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한다. 종말의 쓸모에서부터.

​종말에 대한 관심은 가능한 대안적 세계를 발명하고 상상하는 일에 관여하여 우리의 정신을 인간 조건의 가능성들에 열어놓는다(56). 그래서 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종말이 오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주지 말되 범죄에는 서사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83). 범죄자는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이므로. 무언가를 근본악으로 여기는 것은 가장 손쉽고 무책임한 회피이자 태만이다. 범죄를 서사화하는 행위는 악을 초월성이라는 진공상태로부터 끄집어내 철저히 현실화하는 작업이다(87). 또한 희생자를 연민하지 말고 항상 학살자들의 면전에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인간성의 대표자들로 지명해 들이밀어야 한다. 희생자들을 호명하고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는 이런 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재난과 종말 가능성을 언급하는 데 자본주의가 빠질 수 없다. 국경을 넘나들며 탈영토화된 괴물은 사유의 종말을 지시하며 사유하는 능력을 빼앗았다(93). 자본주의에게 누가 이 강력한 권력을 주었는가. 자본주의의 영구한 통치란 사람들의 착시와 헛된 믿음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신기루와 같다(95).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재단사들이 벌거벗은 리바이어던에게 '보이지 않는 옷'의 신화를 만들어낸 결과로 사람들은 그 옷이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었다. 이로써 자본주의 자체가 망하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우리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게 된다(102).

​여기서 좀비가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속성을 뱀파이어에 비유한 바 있는데, 뱀파이어는 노동자를 이용해 이윤을 획득하고 자산을 축적해 살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피를 공급받아야 하므로 인간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좀비는 거지 몰골에 상한 육체를 끌고 다니며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이 좀비가 초래하는 재난은 바이러스 좀비로 진화하며 더욱 강력해지고, 전방위로 전염시키면서 개인의 1차적 재난을 사회적 2차 재난으로까지 확대한다. 좀비는 느리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재난으로 퍼져나가 자본주의를 파멸로 몰고 간다. 과연 혁명의 괴물이 될 만하다. 마지막까지 피를 빨 먹잇감을 남겨놓아 후일을 도모하던 뱀파이어는 입맛을 다시다가 파멸할 뿐이다. 자본이 의도했던 탈지역화는 바이러스 좀비를 전 세계에서 활개치도록 돕는 일로 만든 채.

​"자본주의가 독점과 착취의 대상을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 광물, 자연환경, 그리고 지구 전체로 확대했을 때, 자본주의는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 다양한 생태적 자원을 관리할 능력이나 의지가 애초에 없다...그 대가는 대규모 재난이라는 형태로 인간에게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깊이 상처 입은 자연은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지만, 자연 앞에서 가진 게 생명뿐인 인간은 달리 지불할 능력이 없다. 이 재난은 익숙한 경제적 재난과는 다르다. 생태적 재난은 종과 지역과 국경을 넘나들며 전 지구를 파멸로 몰아가는 재난, 좀비와 같이 모든 생명과 영토를 절멸로 몰아넣는 재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영향력 너머에서 도래하는 막대한 폭력이다. " 133~134

그래서 좀비는 경고한다. 순진하게도 재난만 종식된다면 다시 일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재난 이전에 일상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고. 자본주의적 일상이 팬데믹이라는 파국을 불러왔음을 인식하라고. 아버지(이 아버지는 종말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홀로 살아남기'에 전력한다.239)의 세계를 멈추고 종말을 끝장내기 위해 종말을 실행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이 심각한 문제의식은 우리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세계, 유토피아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국 종말이란 유토피아에 선행되는 선결조건임을 다시 강조한다. 양치기 소년의 역설(286)은 뱀파이어의 현란한 논리에 흔들릴 뻔한 마음을 다시 잡아주고.

그렇게 자본주의를 지적으로 열나 까주고 고전이 된 좀비영화부터 최신 좀비영화까지 두루두루 훑어보고 나니, 우아하게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사유로 도착해 있다. 결국 종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좀비는 또 다른 미래를 가능하게 할지니 미래에 대한 그림이 슥슥 그려지기라도 할 듯한 뿌듯함으로 책을 덮는다. 그 무엇보다 사유와 성찰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종말을 끝장내자는 저자의 마지막 얘기에 루이 암스트롱의 연주까지 떠올려보면서. 좀비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 없는 나의 '이 책 재밌음' 평가가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기 바라는 마음 가득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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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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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라는 1964년 <거대한 뿌리>를 읽으며 소위 전통 혹은 무수한 반동이란 것들 안에 '애 못 낳는 여자'는 왜 들어가 있는지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김수영을 저항의 시인인 줄만 알고 그의 '바람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풀'을 오해하고, 저항을 제대로 하면 됐지 우산으로 여편네를 때려눕히는 행동은 또 뭔가 궁금하기도 했다. 한때 혁명을 부르짖던 맛탱이간 친구를 욕하는 데 '너는 얼마나 작으냐', 도대체 언제까지 쪼그라들 테냐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를 여러 차례 써먹기도 했었고. 마포에 정착한 후 양계장을 했을 때는 여편네를 얼마나 부려먹었을까 싶기도 했다. 모친이 거지꼴을 하고 구걸하러 다닐 때도 처마 밑에서 책을 읽었다는 청년 김수영이, 양계장 일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노동의 신성함 어쩌고저쩌고하고 있을 게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내 관심은 여기까지였다. 김수영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너머 다른 것들을 볼 수도 있겠지.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책 뒤에 책을 기획한 사람들의 대화에서 이 책의 의도가 김수영을 이해하는 기본서이길 바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획의도가 정말 찰떡이다. 이 책으로 김수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좋아한 반동들도 좋아졌다. 물론 애초에 가진 의심이 깨끗이 거둬지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가족, 여편네, 니체, 전쟁 포로 체험, 돈, 비속어, 온몸, 죽음, 사랑, 풀 등의 26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김수영의 삶과 시를 분석한 글을 엮은 책이다.

​26개의 키워드 중 일본, 일본어와 설움, 여편네, 돈, 비속어, 번역, 여혐, 온몸을 흥미롭게 읽었다. 쉽게 알듯 하지만 또 쉽게만 이해하기 어려운 게, 그의 시에는 생활과 실존, 현재와 영원, 설움과 욕망, 삶과 죽음, 모더니즘과 전통, 혁명과 우울, 해방과 돈, 여편네와 인간, 순간과 무한 들이 복잡하고 불안하게 얽혀 있다. 그 갈래갈래마다 이해의 지점을 두어 가면서 곱씹어 읽으니 그의 시가 입에 붙기도 한다. 특히 돈을 마주한 그의 태도를 언급한 김행숙의 글은, 자신을 바로 보고자 했던 김수영을 보는 김행숙 자신을 바로보는 정시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고, 이 글로 나의 그림자까지 닿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 하러 시에다 돈 얘기를 구차하게 해댔던 걸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너의 질문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라고 말할 것 같다. 돈에 얽힌 사건과 관계와 마음이 구질구질해서, 구질구질함을 의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는 자기 기만과 아이러니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구차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차하고 쪽팔리기에 더욱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수영이 가진 시적 태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김수영을 읽는 일은 돈 얘기를 구질구질하다고 여기 이렇게 쓰고 있는 나의 허위의식이 정확히 발각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시는 불편한 실재의 거울이 되어 나를 건너다본다....김수영의 시는 비루하고 창피해서, 무섭고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바로 보는 정시의 경험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바로 보고자 했는데, 김수영의 거울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본다." 182쪽

자신을 혼동시키고 신경쓰이게 하는 이슈인 돈에 대해서 그는 은유도 상징도 아닌 직설로 돈을 말하고 사유했다. 멋지지 않을 수가 없네. 그에게 시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 게 하는 건 정치적 구속이 아니라면 돈이었을 것이다. 매문에 대한 그의 복잡한 심경이나 여편네에게 느끼는 복잡다단한 감정도 다 돈과 연결되어 있다.

​김수영은 자유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대상에 맞서 자신의 시적 신념을 온몸으로 밀고 갔다(172쪽). 그런 그가 여성멸시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역시 여편네 때문이다. 그 스스로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177쪽)"며 반성도 하지만, 물질주의적 잣대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경쟁을 부추기며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편네를 활용한 점은 은유든 상징이든 김수영의 여성관을 보여준다. '여혐'이란 키워드로 글을 쓴 노혜경 시인은 김수영의 여성멸시를 변호하기보다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다는 노혜경의 분석은 어쩌면 구 여편네 입장에선 더 없이 고단한 일이기도 했을 테지만, 나 역시도 완전 내키는 맘은 아니지만, 결국 김수영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노혜경이 대단한 거다.

"김수영이 여편네에서 다시 아내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화해를 청한 시를 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리라. 시 '이혼 취소'에서 김수영은 빚보증을 선 일을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면서 아내의 속됨이 생활을 위해 피 흘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해를 청한다. 오랜 적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요는,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던 것이다. 이 독특한 타자성의 경험이 김수영에게 여성혐오를(동시에 자기혐오를)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한 채로 중단되었다. 김수영은 '도중'에 죽었다....하지만 그 중단됨을 결말로 삼아 독자인 나는 그의 인생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다행히 그는 죽기 전에 아내를 경유하여 여성이라는 존재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죽음 반 사랑 반"의 존재라는 통찰을 남겼다. 당대의 어떤 시인, 소설가보다 훨씬 집요하게 '여편네'를 탐구한 덕분일 것이다. " 212쪽

그는 얼마나 현재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안겨준 것일까. 끊임 없는 내면 성찰, 세상은 물론 내면의 적과도 싸웠던 양심, 반성하고 부정하고 솔직하고 예민했던 지성 자체, 글쟁이가 되려면 한 번쯤 빠졌다 나와야 하는 용광로. 김수영에 대한 이 같은 김응교의 평가는 과장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름난 여러 문학가가 아예 키워드를 뽑아서 김수영에 대해 다양하게 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수영의 대단함을 알게 한다.

​부럽다. 혐오가 넘치는 시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단순하고 납작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이때,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나서도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꼼꼼하게 이렇게 다채롭게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고맙기도 하다. 김수영에 대한 나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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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서울 지망생입니다 - ‘나만의 온탕’ 같은 안락한 소도시를 선택한 새내기 지방러 14명의 조언
김미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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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세련된 복장 위에 목에 걸린 신분증이 흔들릴 정도로 경쾌하게 걸으며, 고급진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근사한 1층 로비로 들어선다. 깨끗한 통유리로 만든 육중한 자동문이 우아하게 열린다. 경비아저씨와 웃으며 아침인사를 주고받고 엘리베이터로 총총거리며 다가간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끔 동료나 상사를 마주치면 '좋은 아침'이라며 한국어로 직역된, 식상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영어인사를 하고, 나누지 않아도 그만인 정치뉴스나 연예인 소식을 공유하고 나면 업무공간에 얼추 다가간다. 아침에 청소노동자가 깨끗이 닦아 놓은 탁자 위에 가방을 정리해 놓고 편한 신발로 갈아신고 컴퓨터 전원버튼을 켠다. 부팅되기 전까지 풍부한 향을 풍기는 커피 한 잔을 탕비실에서 받아와 오전 회의가 있기까지는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는 개뿔, 서울 중심부에 있는 고층 건물 6층을 주5일, 어떤 때는 주 6일 왔다갔다하며 일을 관두기 직전까지 나는 누구를 죽이고 싶다거나 아님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둘다 하기 싫어서 때려쳤다. 우아하게 열린 자동문과 경비아저씨, 전날 마신 술 기운을 떠쳐내기 위해 마신 커피 얘기만 진짜다.

서울을 욕망했다 탈서울을 원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탈서울 지망생입니다> 역시 더 잘 살기 위해 서울로 진입했다 벗어나려 했을 뿐, 우리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더 잘사는 모습이라고 사회와 미디어와 정치권력이 조장한 그 모습 그대로.

공부 잘 하고 경쟁에서 이겨서 어쨌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또 경쟁해서 좋은 스펙을 쌓고 또 경쟁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또 경쟁해서 승진하고, 그러다 적당히 경쟁에서 성공한 비슷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를 얻고 아이를 낳고 차를 바꾸고 주식을 하고 또다른 부동산에 눈을 돌리고, 그렇게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이야기.

이 책에도 좋은 직장과 좋은 주거조건, 좋은 교육환경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꽉 차있다. 서울 중심부의 아파트에 사는 절적한 교육수준의 경제력 있는 부모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욕망 이야기.

다만 이 책은 서울을 욕망했던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고민에 부딪히고, 대안 마련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실체도 없는 욕망을 어깨에 메고 10년을 넘게 일상을 통제하며 아끼고 아껴서 살아도 결국 제자리일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야 그 욕망을 돌아보게 된다. 탈서울, 이것 자체가 얼마나 큰 실천이고 의지의 전환인가. 인생의 지향점이 달라지는 큰 계기이다.

서울에 올라온 형은 IT개발장이에요. 월급이 계속 올라요. 형은 상황이 괜찮아 보였는데, 그럼에도 어느날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부유한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방에서 빨래 건조대 놓은 공간을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요.

크...방에 건조대 놓을 공간을 고민한다는 얘기에 저절로 공감이 됐다. 월급이 계속 올라도 뻔한 서울의 원룸 주거공간을 벗어날 가능성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를 잘 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날 예능프로그램 <나혼자 산다>를 별생각없이 보고 있었다. 하루는 배우 한 명이 출연해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오피스텔에서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출연자들은 성수동 근처에 무슨 식당이 맛있고, 어디 까페가 분위기가 좋다며 '동네수다'를 질펀하게 늘어놓았다. 솔직히 성수동 주민 아니면 잘 모를 그런 식의 대화를 보는 전국의 1인 가구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서울에 살지 않는다면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인구 절반이 비수도권에 사는데 수도권이라도 성수동이 어디 붙어있는지 모를 수도 있는데...


그 동네가 서울이 아닌 강원도 어디의 동네였다고 해도 그게 동네수다가 되어 공중파에 나올 수 있을까.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 말고 힙한 연예인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말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양질의 삶의 조건을 비롯한 경제사회문화적 인프라가 서울에 있다. 노인에게 더욱 절실한 의료서비스나 아이에게 중요한 교육여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탈서울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정신승리는 필요하다. 궁극적으론 서울이 혼자 독식한 그 많은 사회적 인프라를 나눠야 겠지만.

지역균등발전은 식상한 정부의 구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절실한 이슈다. 우리 스스로도 서울을 욕망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권력은 서울의 고위층 중심으로 세습된다는 것을 누누히 보고 있지 않나. 나머지는 아예 안 되는 게임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애초에 한동욱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책은 탈서울이 낭만적으로 읽히는 것도 경계한다. 진지하게 서울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다면 실제 이를 감행한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쏠쏠하게 챙길 수 있다. 부록으로 '탈서울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 또한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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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그린 사람 - 세상에 지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18인의 이야기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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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던 사람을 보이게 하고 잘 보이던 사람을 낯설게 하면서 사람의 크기를 바꾸어가는 인터뷰집. 여기에 은유에 의해 크게 그려진 18명의 이야기가 있다. 김용현, 김미숙, 김진숙, 김도현은 원래도 큰 사람들이었는데 은유 덕분에 더 켜졌다. 김중미, 이영문, 신영전은 은유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이 하는 일로써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스스로 사유하는 사람들.

스물여섯에 해고자가 된 김진숙은 존엄을 지키기 위한 복직투쟁을 37년간 이어간다. 김혜정은 자신이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반성폭력 활동가로,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 들어감으로써 경쟁할 필요를 가르치지 않는 교사가 되었다. 윈도는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할머니의 이름을 불러주는 경찰로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조기현은 스무살에 아버지를 보살피며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투쟁을 시작한다. 신영전은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며 무상의료에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로, 시와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고 관객에게 찾아가 공연하는 가수로, 민금채는 지구를 위한 대체육 개발자로, 김현은 일상을 위로하는 시인으로, 김혜진은 더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게 하는 글을 쓰는 소설가로, 수신지는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만화가로, 모두 자기 몫 이상을 수행하고 이로써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산재로 가족을 잃은 김미숙과 김도현, 실천 그 이상을 실천해온 김용현, 가슴벅참 없이 읽을 수 없는 인생으로 살아온 김진숙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냥, 사람>으로 이미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유를 들려준 홍은전의 인터뷰는 내 인생도 돌아보게 한다. 그의 세계는 급격이 두 번 바뀌었다고 한다. 노들야학으로 한 번, 고양이로 한 번. 경쟁하지 않는 교육을 주고 받고, 중증장애인과 바다로 모꼬지 가는 법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교육. 그리고 고양이. 인생이 바뀌지 않기 힘들다. 난 사회주의로 한 번, 여성주의로 한 번 인생이 급변했는데, 내 건 고양이나 야학보다는 좀 후진 거 같네. 홍은전은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많은 것들을 인간적인 것이 지쳤다. 나는 동물이다.

이 말이 왜 안도감으로 마음 깊이 박혔는지. 경쟁하고 이기고 물리쳐서 자기가 왕이 되려는 인간이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법무부장관이 되는 꼴을 보았고, 그를 우러르는 인간들에게 크게 상처받았다. 어쩌면 한동훈은 이미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일 것이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포기하며 집요하게 성공에 집착한 결과, 권력을 만끽하는 데 주저함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슬픈 건 그의 안경과 스카프를 칭찬하고,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10대 자식에게 대필문화에 적응하게 한 파렴치한 행위를 능력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다. 영어도 못하고 비싼 스카프 살 능력도 없고 미국대학 보내기 위해 자식에게 뭘 해야 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는 동물이다'는 오히려 인간성을 회복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나도 동물이다.'

돌봄이 긍정적인 인간의 지위를 누리게 해준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거예요. 제가 산업기능요원으로 공장에서 일할 때나 노동현장에서는 선택권이라는 게 없었어요. 부속품, 기계, 노예가 돼요. 힘드냐? 물어봐서 힘들다 그러면 '뭐 힘들어 새끼야. 나이도 젊은 새끼가'하고 욕을 해요. 인간 취급을 못받아요. 근데 보호자로서 모든 걸 선택하고 판단해요. 인간 주체로서 내가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선 역량이 필요하고, 해결할 때마다 입증하죠. 이버지를 잘 돌봤다. 내가 이 문제를 잘 헤쳐나갔다.

당뇨쇼크로 쓰러진 아버지를 스무살부터 돌본 조기현은 '돌봄이 긍정적인 인간의 지위를 누리게 해준다'는 사유까지 나아갔다. 많이 놀랐다. 돌봄이 값싼 여성의 노동력에 기대고 있을 때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이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목소리를 내며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아버지가 쓰러진 일로 스무살의 청년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나는 아빠를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신경쓰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그의 고백은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공감능력을 흔히들 얘기하는데 공감능력만으로는 너무 힘들어요. 공감능력만 있으면 정말 본인이 아파서 먼저 드러눕게 되지요. 공감능력을 필요한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쿠션이 튼튼한 사람이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공감능력과 회복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환자가 위로가 되죠.

<의대생을 학교를 떠나라>는 칼럼을 썼던 신영전의 이 이야기는 왜 공감능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이 공허한지 단박에 알게 해주었다. 공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공감 후 일어나는 일들이다. 공감능력만으로는 본인만 힘들어 드러눕게 되기 쉽다. 성폭력예방교육을 받고 강사가 되려 했을 때, 난 성폭력 사례만 듣고도 드러누워버렸고 강사가 되는 일은 교육이 삼분의 일도 진행되지 않았을 때 포기해버렸다. 회복력이 떨어져 좋은 상담을 하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큰 사람들의 삶을 쓰면서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을 책에 인용했다. 그러게. 자기만의 길을 간다면 남들 따라가거나 흉내내거나 눈치볼 일 없으니 누굴 만나지도 않겠지만 또 만난다해도 별다를 일은 없겠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 사람들 이야기로 한동안 마음이 훈훈했다. 더디지만 꾸역꾸역 가고 있는 나만의 길이 뿌듯하기도 하고. 밀칠 사람도 없이 이길 사람도 없이 한 걸음씩 자기 길 가는 사람에게 깊은 존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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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 '아무 몸'으로 살아갈 권리
김소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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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 중에 가장 높게 치는 것은 웃김이다. 이 세상에 그 많은 책들 중 웃기는 책이 젤 좋다. 글을 쓰면서 조지 오웰처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정치적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역시 놓칠 수 없는 것은 웃김. 정희진의 책은 정치적 메시지가 넘치고 게다 우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웃기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용 하나 버릴 것 없이 웃기는 책을 또 만났다. 사회와 사람, 관계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건드리고 들쑤시고 돌아보고 나서 감동까지 받으라고 한다. 중간중간 크크크크크 웃겨주면서. 나이 든 몸, 장애가 있는 몸, 가난한 몸, 병든 몸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몸에 대하여 썼다고 하는데, 그 몸이 온갖 것들과 부딪히는 대로 생긴 다양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특히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 분석은 글 전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래서 이 책은 40대 여성이 쓴 몸 이야기이지만, 두루두루 읽어볼 만하다. 특히 이준석처럼 몸에 대한 혐오로 자기 입지를 쌓아올린, 입이 역겨운 몸이 뭐가 문제인지 알기에도 좋은 책이다.

돌봄의 윤리, 동물권, 개-되기, 혐오와 수치심, 외로움, 불안, 질병, 죽음, 다이어트, 여성혐오, 성형, 인종차별, 아동학대, 탈코르셋, 장애, 진화론, 무연고 장례 문제까지 몸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기억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그중에 뽑은 몇 가지 이야기.

2019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대소변을 못 가리시니 너무 수치스러워하시더라고요. 그 심정이 이해됐어요. '우리 사회에 늙고 병들어갈 권리가 있을까?' 늙고 죽어가는 걸 수치스러워하도록 조장하잖아요. 호스피스 병원에서도 아버지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거부하셨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분들을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정성껏 마사지해주시고 몸을 씻겨주시니까 아이처럼 기뻐하셨어요. 몸은 몸을 원하거든요. 어릴 때 사랑을 촉각으로 느끼듯이요. 이분들이 아버지 몸을 잘 돌봐주시니까 아버지가 더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셨어요.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걸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몸을 존중할 수 있어요. 209쪽

한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 중 나온 이야기. 그니까. 늙어 죽어가는 게 왜 수치스러워야 하냐고. 누구 안 죽을 사람 있어? 누구 똥 안 싸는 사람 있냐고. 사람은 늙음과 죽음 앞에서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므로, 돌봄 노동자는 최고의 존경과 높은 임금으로 그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고. 국가에서 아예 공무원화해서 고용과 근무조건을 보장하면 더 좋고. 얼마나 중요한 노동을 하고 있는데... 돌봄 노동자가 말야. 자식도 배우자도 못 하는 걸 하고 있다고. 그들의 돌봄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상해야 해. 사회에서 떠받들어야 한다고. (근데 나 요새 자꾸 반말하고 싶어하는 거 같다)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에 대가가 주어지는 게 노동규범인데 이제는 대가가 곧 가치가 됐다고 썼다. 2009년 영국 신경제재단 연구에 따르면 월급 1만 3000파운드를 받는 보육노동자는 임금 1파운드당 7~9.5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지만 연간 소득 50만~1000만 파운드를 받는 투자은행가는 임금 1파운드당 7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파괴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한 동창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에 갔더니 엄마가 나보고 나물을 무치래. 나같은 고급인력한테...그 동창이 외국계 기업에서 공동체를 위해 무슨 가치를 생산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물을 무치면 여러 사람이 한 끼는 먹을 수 있다.193쪽

확실히 임금을 많이 받을수록 사회적 가치를 파괴할 가능성은 커지는 듯. 은행이나 증권사, 정치권력 등 그들이 파괴하는 사회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자기 노동이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는 걸 아는 그 임금노동자는 알까.

나이 드는 게 슬픈 까닭 하나는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느끼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내 인생을 말아먹은 '내면아이'는 여전히 튀어나와 울어재끼고, 그럴 때마다 나는 흰머리 휘날리며 털 많은 원숭이 모형에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다.176쪽

아기 원숭이조차 가짜라도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엄마에게 매달렸던 사례를 들어 얘기한 이 내용은 깊이 감정이입됐다. 내 인생을 말아먹는 '내면아이' 또한 시도때도 없이 지랄발광이다. 내면아이 입막는 법, 내면아이 등장거부권, 내면아이 천당보내는 법, 이런 거 있었음 좋겠다. 털 많은 원숭이 모형에게 달려가기 싫으니.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혐오에 휩싸이게 된다는 점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두려움은 취약성 때문에 생기는데, 인간들은 모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두려움을 부인하지 말고 두려움을 전환시킬 대체물을 만들 필요가 있다. 지식이나 예술은 우리를 달래기 좋은 수단이고 예술의 윤리적, 정치적 역할이 여기 있다.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부정적 에너지는 분노로 이어지고, 밖에서 대상을 찾아 내 두려움을 투사시키게 된다. 혐오의 대상은 이 투사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견한 것. 혐오는 작동방식이 있으므로 이를 알고 멈추게 해야 한다. 이 작동방식에 대한 분석능력이 있어야 쉬운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인정하고 배우고 반성해야 한다.

특히 소수자에게 공적 보호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스피커가 혐오를 승인해주면 정도에 따라 혐오는 급진화되고, 그 스피커에 조종되는 대중은 금방 그 혐오를 따라하게 되고, 자기가 살기 힘들다고 느낄수록 더 강화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생각나는 놈이 있으실 것. 걔 우아하게 욕해주는 걸로 오늘도 보람찬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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