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
고봉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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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무수한 반동이 좋다"라는 1964년 <거대한 뿌리>를 읽으며 소위 전통 혹은 무수한 반동이란 것들 안에 '애 못 낳는 여자'는 왜 들어가 있는지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김수영을 저항의 시인인 줄만 알고 그의 '바람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풀'을 오해하고, 저항을 제대로 하면 됐지 우산으로 여편네를 때려눕히는 행동은 또 뭔가 궁금하기도 했다. 한때 혁명을 부르짖던 맛탱이간 친구를 욕하는 데 '너는 얼마나 작으냐', 도대체 언제까지 쪼그라들 테냐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를 여러 차례 써먹기도 했었고. 마포에 정착한 후 양계장을 했을 때는 여편네를 얼마나 부려먹었을까 싶기도 했다. 모친이 거지꼴을 하고 구걸하러 다닐 때도 처마 밑에서 책을 읽었다는 청년 김수영이, 양계장 일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노동의 신성함 어쩌고저쩌고하고 있을 게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내 관심은 여기까지였다. 김수영과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너머 다른 것들을 볼 수도 있겠지.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책 뒤에 책을 기획한 사람들의 대화에서 이 책의 의도가 김수영을 이해하는 기본서이길 바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획의도가 정말 찰떡이다. 이 책으로 김수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좋아한 반동들도 좋아졌다. 물론 애초에 가진 의심이 깨끗이 거둬지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가족, 여편네, 니체, 전쟁 포로 체험, 돈, 비속어, 온몸, 죽음, 사랑, 풀 등의 26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김수영의 삶과 시를 분석한 글을 엮은 책이다.

​26개의 키워드 중 일본, 일본어와 설움, 여편네, 돈, 비속어, 번역, 여혐, 온몸을 흥미롭게 읽었다. 쉽게 알듯 하지만 또 쉽게만 이해하기 어려운 게, 그의 시에는 생활과 실존, 현재와 영원, 설움과 욕망, 삶과 죽음, 모더니즘과 전통, 혁명과 우울, 해방과 돈, 여편네와 인간, 순간과 무한 들이 복잡하고 불안하게 얽혀 있다. 그 갈래갈래마다 이해의 지점을 두어 가면서 곱씹어 읽으니 그의 시가 입에 붙기도 한다. 특히 돈을 마주한 그의 태도를 언급한 김행숙의 글은, 자신을 바로 보고자 했던 김수영을 보는 김행숙 자신을 바로보는 정시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고, 이 글로 나의 그림자까지 닿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 하러 시에다 돈 얘기를 구차하게 해댔던 걸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너의 질문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라고 말할 것 같다. 돈에 얽힌 사건과 관계와 마음이 구질구질해서, 구질구질함을 의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는 자기 기만과 아이러니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구차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차하고 쪽팔리기에 더욱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수영이 가진 시적 태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김수영을 읽는 일은 돈 얘기를 구질구질하다고 여기 이렇게 쓰고 있는 나의 허위의식이 정확히 발각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시는 불편한 실재의 거울이 되어 나를 건너다본다....김수영의 시는 비루하고 창피해서, 무섭고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바로 보는 정시의 경험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바로 보고자 했는데, 김수영의 거울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본다." 182쪽

자신을 혼동시키고 신경쓰이게 하는 이슈인 돈에 대해서 그는 은유도 상징도 아닌 직설로 돈을 말하고 사유했다. 멋지지 않을 수가 없네. 그에게 시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 게 하는 건 정치적 구속이 아니라면 돈이었을 것이다. 매문에 대한 그의 복잡한 심경이나 여편네에게 느끼는 복잡다단한 감정도 다 돈과 연결되어 있다.

​김수영은 자유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대상에 맞서 자신의 시적 신념을 온몸으로 밀고 갔다(172쪽). 그런 그가 여성멸시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역시 여편네 때문이다. 그 스스로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177쪽)"며 반성도 하지만, 물질주의적 잣대로 자신을 소외시키고 경쟁을 부추기며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편네를 활용한 점은 은유든 상징이든 김수영의 여성관을 보여준다. '여혐'이란 키워드로 글을 쓴 노혜경 시인은 김수영의 여성멸시를 변호하기보다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다는 노혜경의 분석은 어쩌면 구 여편네 입장에선 더 없이 고단한 일이기도 했을 테지만, 나 역시도 완전 내키는 맘은 아니지만, 결국 김수영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노혜경이 대단한 거다.

"김수영이 여편네에서 다시 아내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화해를 청한 시를 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리라. 시 '이혼 취소'에서 김수영은 빚보증을 선 일을 해결하고자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면서 아내의 속됨이 생활을 위해 피 흘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해를 청한다. 오랜 적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요는, 여편네는 고립된 삶을 살던 그가 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자였던 것이다. 이 독특한 타자성의 경험이 김수영에게 여성혐오를(동시에 자기혐오를)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한 채로 중단되었다. 김수영은 '도중'에 죽었다....하지만 그 중단됨을 결말로 삼아 독자인 나는 그의 인생이 완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다행히 그는 죽기 전에 아내를 경유하여 여성이라는 존재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죽음 반 사랑 반"의 존재라는 통찰을 남겼다. 당대의 어떤 시인, 소설가보다 훨씬 집요하게 '여편네'를 탐구한 덕분일 것이다. " 212쪽

그는 얼마나 현재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안겨준 것일까. 끊임 없는 내면 성찰, 세상은 물론 내면의 적과도 싸웠던 양심, 반성하고 부정하고 솔직하고 예민했던 지성 자체, 글쟁이가 되려면 한 번쯤 빠졌다 나와야 하는 용광로. 김수영에 대한 이 같은 김응교의 평가는 과장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름난 여러 문학가가 아예 키워드를 뽑아서 김수영에 대해 다양하게 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수영의 대단함을 알게 한다.

​부럽다. 혐오가 넘치는 시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단순하고 납작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이때,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나서도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꼼꼼하게 이렇게 다채롭게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고맙기도 하다. 김수영에 대한 나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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