삘릴리 범범 사계절 그림책
박정섭 지음, 이육남 그림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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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기부터 범상치않다. 이 그림책은 크기가 스포일러 요소. 그리고 제목. 삘리리~가 나오면 내 정서로는 그 뒷말이 개골개골이다. 삘릴리 개골개골 삘릴릴리~. 그런데 여기선 범범.

​색감도 신선하다. 다양한 농도의 먹색과 노란색, 빨간색이 다다. 노란색은 주로 인간의 욕망과 닿은 색이다. 그 욕망을 발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피리도 노란색, 돈으로 치장할 수 있는 호랑이들의 장신구들도 노란색, 집계약서, 돈 그 자체, 음식물도 노란색이다. 결정적으로 돈에 눈이 먼 자들의 눈도 다 노란색이다.

​소금장수가 쓰고 있는 가면에만 빨간색이 쓰였다. 가면을 벗은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소금장수가 결국 편안해진 후 그 사건 사고 많았던 집에 걸린 가면을 보고서야 벗을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가면을 벗으면 진짜 쉴 시간. 마지막 장면의 집 그림에서 소금장수가 이제는 정말 쉬게 되었나보구나, 메시지를 준다.

​이야기는 소금장수의 가난에서 시작한다. 작은 몸에 자기 키보다 높고 짊어진 소금가마. 소금장수의 표정이 심란하다. 산 좋고 바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토선생 부동산을 만난다.

부동산 사무실 안에 노란색 눈을 부릅뜬 공인중개사가 토선생. 부동산 사무실 소파에 토끼 쿠션과 호랑이 쿠션이 함께 있다. 채식을 하는 토끼의 소파는 가죽 덮게가 있고. 토선생의 쥬토피아에선 토끼 혼자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토끼의 외모는 현대인에게 과대평가되어 있다. 순하고 하얗고 예쁘기만 한 토끼는 없다. 이 극에서 토끼는 약간의 사기를 치고, 자기 지분을 가지고 투기와 사기를 적절히 버무리며 몰래 도둑질도 한다.

​이 호랑이들은 하체를 드러내기 싫었는지 바지를 입고 소금장수 피리소리에 춤을 추던 댄서들이다. 범범의 실체. 지금은 뭔가 꿍꿍이 구상중. 궁금하지? 이 책은 동물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버린 그림책이니 권력을 호랑이가 휘두르고 토끼가 춤을 출 거란 생각은 버리셔.

​건물주가 희망이라는 초딩들에게 부동산을 살 때는 권리관계를 잘 살펴 호랑이같은 우선권리자를 조심하라는 메세지를 주려는 건가, 란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소금장수가 원한 건 작은 꽃병이 올려놓을 수 있는 책상이 있는 방 한 칸이었다. 돈과 탐욕이 호랑이와 토끼와 함께 추락하자 소금장수는 잘 먹고 일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작은 집에서 행복을 누린다.

​그의 마지막 집에서는 노란색은 병아리의 색이 되고, 가지가 가지색을 찾고, 붉은 색은 꽃과 잘 익은 감으로 옮겨간다. 그럼 됐지. 호랑이들의 춤과 재롱을 보고 났더니 소금장수의 안분지족의 삶이 결론으로 다가왔다. 작은 나라 반토막난 반도의 섬 같은 땅에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몇십 층으로 포개고 또 포개진 콘크리트 벽구조물을 구입한 사람들 생각도. 영혼은 그런데 끌어모으라고 있는 건 아니니 이미 큰 상처 받았을 터, 혹시라도 끌어모은 영혼이 남아있다면 앞으로 부동산 왕창 올라 그 영혼 위로받으시길.

​거기에 더해 마지막 큐알코드를 통해 소금장수의 피리소리도 감상하시고. 스트리트호랑이파워를 보여주는 호랑이들의 기념사진도 보시고(호랑이들의 형편은 여전한가. 하체만 가리는 바지패션을 고수하고 있다). 부동산 사기좀 치다가 결국 호랑이들 옆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망한 토선생의 말로도 구경하시고. 그럼 이 아리송한 그림책 구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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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당신과 나의 공동체
벨 훅스 지음, 김동진 옮김 / 학이시습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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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공동체 이야기,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읽으며, 책 읽는 내내 작년에 고인이 된 벨 훅스의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여성 지식인으로 사는 일은 어땠을까. 지상의 70여 년은 지독히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였다. 자기를 위축시키고 납작하게 만들려는 다층적인 억압에 맞서, 벨 훅스의 생각은 그만큼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너무 피곤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벨 훅스의 목소리는 힘차고 설득력 있지만, 그 차분한 논지 전개에서 고단함이 먼저 느껴졌다. 흑인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의 생각은 강의실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희망을 얘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우린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 쉽지 않을 그 과정에 15년 넘게 교육의 문제에 집중했던 벨 훅스의 이 책은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고 있던 벨 훅스가 이렇게나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차별금지법 세대들은 인종차별이란 무지하고 보수주의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기도록 사회화되었다. 인종차별은 주로 과거의 일이고, 백인성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믿어왔다....지금 여기 인종차별주의라는 유령을 기르는 것, 정치적 신념과 성적 지향이 무엇이든지간에 백인들은 백인우월주의적 사회구조에서 이익을 얻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55쪽

유령과 싸우는 건 얼마나 더 어렵고 고단한 일인가. 항상 지금은 나아지지 않았냐고, 언제까지 불평불만이냐고, 옛날같으면 넌 감옥에 갔을 거라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윽박지른다.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령은 저항의 목소리를 거두도록 그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배회한다. 그 유령 앞에서 한두 번 고꾸라지고 나면 기운 차리기가 힘들다. 벨 훅스의 책 곳곳에서도 관계를 맺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뒤에 서 있는 유령의 인종차별적 면면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훅스가 싸우고 있는 문화는 "제국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문화"다. 이런 사회에서 식민성을 가진 비백인이 빈곤한 상태로 가부장의 억압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중첩되는 모순 속에서 한 개인은 옴싹달싹 못한 채 전방위적인 자기비하와 열등감 강요, 미래를 꿈꿀 수 없음에 시달려야 한다. 이들이 억지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도 그다지 아름답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벨 훅스의 고민도 전방위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제국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문화"에서 이제 막 사회시스템을 내면화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합법적인 경멸과 혐오, 지배와 약탈을 주입시킬 뿐이다. 벨 훅스가 교육과 공동체를 더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벽 앞에서 교육이나 공동체를 꿈꾸는 건, 섬김과 돌봄을 얘기하는 건 너무 나약한 자기만족적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거리에서 소리치고 물리적으로 저항하고 적에게 작은 피해라도 입을 수 있는 일도 하나의 수단이지만, 결국 저항도 모순을 깨닫는 일부터 시작된다. 교육의 그 첫발을 뗄 때부터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함께 해야 할 일이다. 혹시나 지금 처한 차별의 현장에서 상처받았다면 한 발 물러서 여기 벨 훅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시길. 이토록 섬세하고 깊게 교육함과 교육받음을 고민한 사람에게 기대 이상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교육하는, 혹은 교육받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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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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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저항도 아름답고 예술도 그러한데 저항의 예술이라니. 포스터 한 장 한 장마다 저항의 메시지와 함축된 분노가 강렬한 사진과 글로 외치고 있다. 프로파간다 예술은 가슴을 쿵쿵 울린다.

​여기 실린 메시지와 이미지로 세상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고통을 공유하며 다른 사회적 목소리를 낼 기운을 얻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오래오래 두고두고 볼 만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창의적으로 저항하고 조롱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삶의 환희가 탄생한다. 저항은 인간에게 막을 수 없는 불꽃과도 같지만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대개 우리의 저항할 권리를 장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은 심각한 위험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저항하는 이들은 비웃음을 당하거나 체포당하거나 투옥되기도 하며 고문당하거나 때로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우리의 권리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권리는 자유 사회의 기본권으로 정해져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작가와 예술가들이 재능을 발휘하고, 우리 모두는 예술을 통해 웃고 울고 노래하고 즐길 수 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훼손된다면 분노할 것이다. "171쪽

48쪽. 백인 아닌 여성들은 강제 불임수술을 반대하는 싸움을 해야 했다. 한쪽에서는 낙태를 못하게 하고 한쪽에서는 강제 불임수술을 한다. 여성의 몸이 이용되는 두 극단적인 사례에서 아이를 가지지 않을 권리와 아이를 가질 권리가 누구에 의해 조종되는지 돌아보게 된다.

53쪽. 2013년 3월 9일 실제 구글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포스터. 구글의 자동완성 기능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99쪽.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포스터. 전쟁 반대 행진을 위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2003년 이라크에 대한 영국의 군사침공에 항의하기 위해 개최된 집회에서 사용되었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이미지를 꼴라주로 활용. 전쟁 대신 차를 만들었더라면 이 세상은 더 얼마나 평화로웠겠느냐고.

167쪽. 플라스틱 뱅이 아니라 킬러 백이다.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의 소규모 서핑 공동체에서 파생한 영국의 환경 자선단체에서 제작한 포스터. 오늘날 플라스틱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여기 나온 녹색 비닐봉지는 실제 그리스에서 다이빙하던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라고. 이 캠페인이 진행된 뒤 2015년부터 영국에서는 비닐봉지 사용에 요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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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 잃어버린 세계와 만나는 뜻밖의 시간여행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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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이지만,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지 않았어도 잊혔거나, 혹은 이미 사그라지는 곳이거나 현재 위협받고 있는 37개의 장소들의 이야기이다. 

낯선 곳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지도로 살펴보는 일은 늘 흥분된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각각 나를 끌어당기는 장소들을 살펴보고, 도보로 갈 수 있는지 차로 가야 하는지 가늠해보고, 작은 기호도 놓치지 않으려 하며 좁은 골목길들을 눈으로 산책해본다. 그리고 직접 그곳에 갔을 때 내 감각이 얼마나 맞아떨어졌는지 맞춰보는 일도 흥미진진하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해도 꿔다 놓은 돌무더기로 보이는 일도 있으니 그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왜 그리 감흥이 없을까, 의문이지만 이유를 알 수도 없다. 때로는 사전 공부를 많이 하고 갔을 때 그러기도 하고 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쳐서 그렇기도 하다. 어렵고 힘들게 도착해 마주한 건축물이나 장소에서 그렇게 느끼기도 하고, 그저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에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부디 설레주기를 바랄 뿐. 

37개의 장소를 훑어보며 우선 내가 가본 곳, 익숙한 곳을 찾아본다. 가본 곳은 팔랑케와 베네치아밖에 없구나. 익숙한 곳은 페트라, 알렉산다르아, 스청, 다뉴브강, 투발루. 가 보고 싶은 곳은 랩티스마그나, 시우다드페르디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 지도와 함께 현재의 생생한 모습과 장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충분히 실려 있다.    

멕시코 여행 중 찾았던 빨랑께. 마야문명의 고전기(서기 250~900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상업과 예술, 종교의식, 유혈 낭자한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던 위풍당당한 중심지였다. 마야 달력에 세계의 멸망이 예언되었던 날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예언은 맞지 않았고 나 역시 이곳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다. 티칼과 꼬판 등을 거치며 비슷한 유적들을 너무 많이 봐서 눈이 지루어져버렸기 때문. 가끔 너무 많이 보는 것도 문제다.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인근 지도(196쪽). 파란 지역이 매년 1050번 침수가 일어나는 구역이고 주황색 지역이 이미 운하 벽이 상당히 손상된 주요 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치아는 117개나 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을 잇는 다리들이 여기저기 있다. 당연히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시. 4세기부터 게르만족, 서고트족, 훈족의 침입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  

이 광장을 보니 반갑다. 산 마르코 광장(199쪽) 앞에서 마셨던 잊을 수 없는 13000원짜리 에스프레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못 보고 와서 언젠간 꼭 다시 가야 할 곳. 

이런 풍경이 뿜어주는 이야기를 모르고선 산과 나무와 하늘, 돌로 이루어진 계단과 평지를 발견할 뿐이다. 사라져간 이 장소는 사우다드페르디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선 스페인이 멸망시켜 1970년이 되어서야 알려진 콜롬비아 지역의 타아로나 문화. 그리고 사우다드페르디다를 잊지 않은 코기족 사람들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많은 고대문명이 그렇듯 여기도 탐험을 핑계로 한 도굴꾼들에 의해 알려졌다. 남미여행을 언젠가 하려고 늘 계획만 하고 있지만 콜롬비아에 가면 꼭 가볼 도시로 찜해둔다.

꼭꼭꼭 가보고 싶은 곳, 알렉산드리아의 과거와 현재 지도(73쪽)도 눈 안에 꾹꾹 담아둔다. 헤파티아와 에라토스테네스가 있었던 곳에 가보고 싶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궁정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면서 헬레니즘 세계에 가장 위대한 도시로 부상했던 이곳. 이곳의 도서관에 매혹되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뭔가 되는 걸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석 사서가 되고 싶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 파로스 섬에 지어진 유명한 등대의 상상도(70쪽). 선박을 인도할 목적으로 세운 최초의 건축물로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완공되어 600년 넘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입구를 지켰다. 지금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당시 지중해와 홍해의 무역을 지휘했던 당당함이 떠오른다. 

이 지도책의 매력은 역사적 맥락의 이야기들과 함께 현재와 과거의 지도가 상세하게 실려 있고 풍부한 사진자료가 함께 한다는 점. 잠깐 이 지도에서 빠져나와 구글지도를 켜고 사라져가는 장소들을 살펴본다. 호기심이 생기고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나고 그곳에 직접 서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이미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지만 정말 사라져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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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 예찬 -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
김지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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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예찬, 제목 참 좋다. 내밀함을 어찌 예찬하지 않을 수 있으리.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이라니. 함께 예찬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리라.

이 결심이 잠깐 유보되는 사이 낯설음을 먼저 느꼈다. 저자는 충분히 내밀함을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예찬할 만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니. 내밀함을 예찬하는 사람이 당연히 홀로 머물고 있을 거란 생각은 내 착각이었다. 이 책은 은둔과 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향인의 기록이었다. 비행기 타고 16시간을 간 곳에서 호텔에 꼼짝 않고 혼자 있고 싶다던 선배도 생각났다. 시부모와 남편과 아들 둘을 떠나 공식일정 외에는 혼자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선배는, 낯설고 신기한 그 외부세상을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직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저자는 MBTI 얘기로 글을 시작한다. 좀더 복잡해진 혈액형버전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그런 성향이라는 거지 내 운명이 그러하다는 건 아니니까. 미친듯 일하러 다닐 땐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알았지만, 일 관두고 보니 난 뼛속까지 내향인이었다.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억지로 웃고 화통한 척하며 살았는지, 그 오랜 시간이 신기할 뿐. 9년째 내향인 성향 유지 중. 매일 억지로 출근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저자의 다음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합리화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 다음에 뒤따라야 할 성숙한 태도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봐야 겠다'일 것이다. 그래서 본성을 거슬러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한다. 대화에 서툴러도 앞에 앉은 상대방이 불편할까봐 어떤 이야기든 꺼내려는 사람들, 주목받는 게 싫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무대 위에 오르는 사람들, PPT화면에 의지하여 갈라진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가끔은 애잔함도 느낀다."

그 애쓰는 사람들이 그만 해야 할 때도 잘 알았음 좋겠다. 태어남-자람-어른됨-취업함-결혼-출산-육아-계속 살아감,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언젠간 스스로 내려올 때도 있어야 할 테니까.

"세상의 많은 무표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집중하는 사람의 무표정이 아닐까. 컬링계의 '안경선배', 김은정 선수의 한결 같은 얼굴처럼 말이다...언제나 한결같이 의연한 얼굴의 김연아 선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도 생각난다. "경기 중의 표정이나 감정표현은 반복된 훈련의 결과일 뿐, 경기 상황에서 음악의 정서에 실제로 빠져드는 것은 불가능해요." 평상시 덤덤한 얼굴의 그녀가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때쯤 보여주는 표정들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 또한 무한한 훈련의 결과라는 것이다."35쪽.

열심히 사는 동안 그 무표정에 얼마나 고생과 애쓰임이 함께 하는지. 그들에게도 내밀한 시간은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무표정으로 살기 힘들다. 주로 미소지음으로 상대의 반감을 허물고 적당히 굴복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도 될, 가면을 벗고 깊은 한숨이라도 마음대로 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저자 말대로 '숨고 싶지만 돈을 벌어야 겠'으니 말이다. 지극히 내향적인 내 지인도 타인과 있을 땐 얼마나 사교적인지 많이 놀란다.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든 해낸다(65쪽). 그래서 고양이들이 더 부러운지 모르겠다. 기싸움도 감정적 줄다리기도 자기 파이도 연연하지 않는 존재 고양이 헤네(78쪽). 인간에게 거는 큰 기대가 없으니 인간의 실체에 타격받지 않은 채로 영원히 내밀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이들은 내밀예찬의 예찬을 받을 만하다.

"어떤 사람에게 해도 무난한, 어떤 상황에서 해도 대충 통하는 의례적인 말들은 편리하지만 게으르다. 어떤 모임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에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같은 이유일 것이다."131쪽.

​이 이야기도 적극 공감되었다. 내게 수다는 스트레스 해소 기능이 없다. 실컷 수다를 떨면 더 피곤하다. 하지 않았도 좋았을 얘기들이 생기고,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지루한 이야기들은 그저 지루할 뿐이다. 수다에는 품앗이 기능도 있어서 타인의 얘기를 듣고 나면 내 얘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싫다. 목적과 주제가 있는 대화를 즐길 뿐.

​이 내밀예찬엔 팬데믹 상황도 적절히 잘 녹아있다. 이메일을 선호하고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술자리를 추모하고 정적을 찾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들. 내향인인 저자가 직장에서 집에서 일에서 자기를 지키며 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을 따라가보다 절로 응원하게 된다. 이미 결혼과 출산이라는 은둔하지 힘든 평범테크트리를 탔다면 그저 많이 지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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