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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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섹스할 권리>>를 읽었다. 어떤 책을 읽었다,로 책 읽는 얘기를 시작하는 건 그만큼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세상에 없던 문장을 만났고, 복잡하고 모호했던 생각을 뚜렷하게 만드는 논증을 접했다.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은혜로운 페미니즘 샤워를 한 느낌. 젠더 이슈로 고민이 많은 자는 이 책으로 축복받을지어다.

이 무슨 과장과 확대해석의 혹세무민 오두방정인가 싶겠지만, 주디스 버틀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놀라울 만큼 비범하고 유망한 저작'이라는 평가가 빈말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 복잡한 감동과 깨달음, 그 감탄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지인들에게도 '그냥 읽어, 무조건'이라고만 말했다.

진입장벽은 좀 있다. 젠더 이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쉽게 읽히지 않을 테고,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래도 꾸준히 읽다보면 가장 뜨거운 이슈들과 맞닿을 수 있다. 그것도 강력하게 설득력있는 진보적 관점들이 또박또박 자기 얘기를 하는데, 그 거침없음에 또 감탄하게 된다. 당당한 강간범들, 포르노의 당파성,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범죄의 잔인함과 그 논리의 허접함, 섹스하는 대상선정의 복잡미묘함 등의 이야기가 시원시원하게 심층적인 젠더의식으로 파헤쳐진다. 특히 '욕망의 정치' 챕터는 섹스에 대해 솔직히 얘기할 수 있는 가까운 지인들과 토론모임을 만들어 같이 읽어보면 좋을 거 같다.

"한 무리에게 샌드위치를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섹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요구를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통했다고 저기서도 통하란 법은 없다.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며 사실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이토록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이만큼이나 침범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좋든 나쁘든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섹스를 이해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156쪽"

그러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이해할 방법을 결국 찾아야 한다. 욕망이나 본능으로 쉽게 퉁칠 수 없다. '섹시한 백인의 금발 헤픈 년들'이 자신의 섹스할 권리를 박탈했다며, 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엘리엇 로저 사건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하다. 가부장제의 남성 권력이 뒤틀어질 대로 뒤틀려 결국 살인 정당화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연구사례가 될 만하다.

책 제목이기도 한 '섹스할 권리'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섹스할 권리는 없다. 애끓이고 간청하고 배려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혼자 할 거면 상관없지만 또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벌이는 행위이므로. 그건 권리일 수도 없다. 벌써 화끈하다. 왜 없는지 이 책을 읽으며 기분좋게 설득당한다.

이 새로운 사고는 저자의 정체성에서 더 빛을 발한다. 구석에 몰리면 더 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니까. 그는 여성이자 비백인이고 1984년 생이며 옥스퍼드대학 석좌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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