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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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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 832 p

묶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의 거래에서 자신을 지켜냈는가? 악마는 신과의 내기에서 진 것일까?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풀다: 파우스트는 연인과의 사랑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에서 세상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던 그가 극이 전개되는 동안 조금씩 자기 자신을 벗어났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게 되었다. 곧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는 것. 절망과 실패, 허무와 근심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근대적 인간의 시작이 파우스트가 아닐까?



인상적인 한 장면


가야할지 와야할지 결심이 안 섭니다.

훤히 뚫린 길 한복판에서 발걸음이 자꾸만 비틀거립니다.

점점 깊숙이 길을 잃고, 모든 짐작이 벗어나서

자기와 남에게 폐를 주고, 숨을 쉬면서도 숨막힌 것 같으며

숨은 막히지 않았으나 생기가 없고, 절망은 않지만 사는 보람은 없지요.

줄독 이리저리 동요하며 그만두자니 괴롭고, 강요당하기는 불쾌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기운도 나지 않으며,

그래서 그 자리에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 p. 445 비극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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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 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
김기원추모사업회 엮음, 김기원 지음 / 창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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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기원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

http://blog.daum.net/kkkwkim/

철학을 한다면, 경제학을 한다면 이 사람처럼 하고 싶다.


풀다: 진보는 싸가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싸가지 없다'고 욕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진보 역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그 방향은 '진짜 인간' 현실 속의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우리는 자본가계급에 대해서 생각하는만큼 귀족 노동계급에 대해 사유해야 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합리적 이성의 주체, 성인군자가 아닌 현실 속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 구조를 현실적으로 바꿔나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진보 경제학자. 그 중에서도 비주류로 분류되는 김기원은 이를 위해 누구보다 오늘날 우리 사회 각 현장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너무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선악 구도의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과학적 증거들을 수집하여 합리적인 맥락을 부여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태도로 한국인과 한국 사회, 한국 경제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미국식의 혹은 유럽식의 처방을 그대로 따르려 들때마다 우리는 무력감에 빠진다. 엄격한 법 질서가 바탕이 된 사회적 인식도 지역 사회에 뿌리를 둔 신회 자본 역시도 열악한 우리 나라의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인'에 대해 사유하는 일이 모든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로 효과적인 처방을 발견하기 위한 첫 단계임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아마 이런 맥락에서 '문화혁명'이 절실하다고 경제학자가 힘주어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묶다: 경제적 임금을 통항 경제 민주화? or 사회적 임금(복지)을 통한 재분배?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 


풀다: 저자는 사회적 임금(복지)의 확충을 통해 비정규직, 하청업체 등 '을'들이 일정 수준의 경제적기반을 확보했을 때 협상력이 생긴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갑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을들은 스스로 경쟁력을 기를만한 안정적인 직업 환경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을들이 실질적인 노동, 기술 경쟁력이 곧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임금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시장 원리 상 한계가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협상력을 가질만한 수준으로 시장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교육비, 주거비, 의료비의 공영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노동계약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다. 귀족 노조는 제왕적 자본이 물에 비친 그림자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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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쓰러지다 - 르포, 한 해 2000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를 기록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7
희정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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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산업, 규제 풀면 5년 내 52만 명 일자리 생긴다”


규제로 사라진 청년 일자리’   


 어제자(3월 29일) 한국일보 2면 특집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틀간의 시리즈 기사를 읽는 중 설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규제공화국’ 인대 한민국에서 청년들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선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규제를 더 신속하게 많이 없애야 한다는 게 논지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인용된 대화문부터 정확히 어떤 규제가 문제인가를 짚어내지 않고 있었다. 결국 전체기사에서 단 하나의 원칙만 등장한다. ‘기업활동에 방해가 되는 규제라면 없애도 좋다’ 뒤이어 관광비자, 면세점 사업, 개인정보 활용 등조 금이라도‘비효율적 규제’ 논란이 있었던 모든 사업분야를 폭넓게 다룬다. 논조는 공정한 시장질서, 사회적 신뢰구축을 위해 고안된 규제라도 수익성(00개의 일자리)만 증명된다면 언제든지 철폐할 수 있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결국 규제개혁에는 기업 하기 ‘편한 환경을 구축하는 목표만 남는다.




1. 관치의 잔재인 행정 규제와 시장경제 규제는 다르다.


"2년 전 공장을 신축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에 건축허가를 신청했더니 차일피일 미루다 자치단체장이 공약으로 내건 지역 숙원사업(체육관 신축)을 우리 회사가 처리해 주면 좋겠다는 요구를 해 오더군요. 허가를 내줘야 하는데도 지자체장이 계속 승인을 미뤄 곤욕을 치렀습니다. 설비 투자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허가권자가 질질 시간을 끌면 그 손해는 기업이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일보가 실시한 ‘규제 개혁 관련 설문조사’에 응한 A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하소연이다. 그는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일부 지방 중소도시에는 아직도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대가를 요구하는 관행이 남아있다”며 “지자체와 경찰의 규제 개혁 마인드는 여전히 바닥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3월 29일 자 2면 기사 “빅데이터 산업, 규제 풀면 5년 내 52만 명 일자리 생긴다”

  기자 역시 명문화된 규제 제도가 아닌 규제 집행 과정의 잘못된 관행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위 같은 상황에서 A기업 대표를 돕기 위해 필요한 처방은 불필요한 ‘행정규제의 폐지’가 될 것이다. () 주도 시절의 관행 인각 종인 허가절차가 경제활동에 비효율을 조장해 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 건축을 통제하는 것 역시 정부 규제가 맡아야 할 역할이다. 규제내용 자체는 관할 공무원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부정부패가 유발된 현실과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한다. ‘규제’ 전체를 뭉뚱그려 비판한 결과 모든 규제가 곧 비효율성의 온상이라는 프레임만 부각되었다. 정작 문제는 규제를 둘러싼 각종 관행을 눈감아온 주체들의 도덕성과 자질이다. 하지만 이 인용문 뒤에 이어지는 비판은 관치행정의 비효율성이 아닌 시장 경제에 관련된 규제들로 곧장 이어진다. 행정규제와 시장경제규제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이와 함께 규제를 집행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자질과 도덕성의 문제는 가려진다. 가장 먼저 중국인 관광객 의무 비자 입국 허용범위를 늘려야 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2. 규제 풀면 00만 개 일자리가 생긴다?


 한국을 경유하는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 허용도 그런 예다. 이렇게 규제가 풀리며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은 연간 1만 9,000여 명이나 늘어나고 157억 원의 추가 관광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2013년 432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으로 인한 고용 유발 효과가 24만 798명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100명의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유치하면 평균 5.57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  한국일보 위의 기사    


 더욱이 규제가 철폐되면 경제적 성과가 보장된다는 계산법은 현실을 돌아봤을 때 안일한 숫자 놀음이다. 현재 한국을 다시 찾는 중국 관광객이 갈수록 줄어들고, 체류 기간도 감소하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재방문율은 20%에 불과해 이웃나라 일본이 80%에 이르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부분 한국을 싼 맛에 들어왔다 쓴 맛만 보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쇼핑 중심에 바가지요금, 별다른 문화 관광 콘텐츠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지방 도시 투어 중심으로 재방문 관광객들을 위한 다각도 전략을 구상하는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비자 규제만 완화한다고 위의 전망과 같은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재방문율이 개선되어 안정적인 관광 산업이 인력을 고용하지 않는 한, 어쩌다 한 번 싼 맛에 오는 관광객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식의 사업으로는 청년들이 원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준비가 덜된 우리나라엔 비자 규제를 풀어 무작정 관광객 숫자를 늘리기보다 바가지요금, 저가 여행사, 무자격 가이드를 솎아내기 위한 규제를 통해 관광산업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도움이 되는 전략일 것으로 보인다.        


3. 모든 법은 그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한다.


 “5년마다 허가권을 다시 심사받아야 한다는 건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로벌 유통전문지 영국 무디 리포트의 더못 데이빗 사장이 최근 방한했을 때 한 이야기다. 
- 한국일보, 인허가에 파국 내몰려 [규제개혁 없이 미래 없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법이 나온 것이다. 규제 법안은 각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이다. 이 특수성에는 경제 구조의 특수성과 사회적 여론의 풍향도 포함된다. 면세점 특허기간을 5년 이내로 제한한 일명 ‘면세점법’은 현 정부에 들어서 뒤늦게 ‘졸속 입법’이라 비판받고 있지만 2012년 11월 발의 당시에는 재벌 특혜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커지는 사회적 분위기로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중소중견 기업 제품 판매, 지역 경제 활성화, 이윤의 사회 환원 등의 사회적 기여도가 낮다는 문제가 경제적 효율성보다도 중요한 해결과제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1분 졸속”이라 비난받을지라로 애초에 사회적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합법적 절차를 거쳐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법안이다. 그간 재벌 기업이 누려왔던 혜택과 비합법적인 고용 승계, 제왕적 지배 구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이고 쌓인 결과였다. 면세점 사업의 이윤이 특정 주체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며, 그것이 재벌경제구조에서 주변부 중소상업으로 확산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 면세점법이라는 일종의 제어 장치로 가시화된 것이었다.


탈락 면세점 직원들 울렁증, 대인기피증 호소   


 무엇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특정 법안이 정식 절차를 밟아 국회를 통과한 이상 법안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수정되기 전까지는 그 룰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막강한 시장 영향력을 자랑하는 몇몇 경제 주체와 새로운 정치권력은 일단 한 판 열띤 승부를 벌인 뒤에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아예 판을 엎어버리겠다고 나서고 있다. 새로운 규칙으로 시장 경쟁을 한 결과 낙오된 기업과 20대 국회는 법안 자체를 폐기하고 경쟁의 결과 자체를 뒤집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19대 국회에서 새로운 관세법이 통과된 이후로 재심사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탈락한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과 SK 워커힐 면세점은 스스로가 면세점 사업자 심사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 승자와 패자가 뒤바뀔 수 있고, 같은 룰로 게임을 하는 공정 경쟁이었지만 관련 직원의 대량 실직사태가 벌어졌으니 나라가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식의 배짱은 재벌 기업이 자신이 소유한 막대한 자본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탈락 면세점 직원들의 울렁증과 대인기피증을 앞세워 면세점법의 잔혹성을 선전하는 것 역시 그간 누려왔던 시장 점유율 90%의 고지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읽힌다.


 진정 '시장 질서를 위한' 규제 개혁을 주장하고 공정 경쟁의 결과에 순응할 생각이었다면 면세점법 도입에 따라 나름의 대비책을 간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규제에는 ‘졸속’, ’ 비효율’의 꼬리표를 붙여 민주공화국의 정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 (*2014년 기준 국내 전체 면세점 시장점유율은 롯데 50.7%, 호텔신라 30.7%로 둘을 합하면 81.4%나 된다. 서울 시내로만 보면 87%를 차지하고 있는 독과점 구조다. 법안 발의 당시 80% 초반이었던 대기업의 면세점 시장 점유율은 2015년 90%로 높아졌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규제가 정말 많은가?   


 이 질문에 답을 찾던 중 작년에 읽은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제목은 <노동자, 쓰러지다> ‘르포 - 한 해 2000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를 기록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었다. 우리 사회에 규제가 많은지 적은 지는 잘 모르겠다. 국민 개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심리 자본이 열 약한 우리나라에 현실적으로 얼만큼의 법적 규제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자의 생명과 관련된 규제가 충분하지도,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문제는 규제의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위해 규제를 만들고 진정성 있게 이를 지켜나가는가에 달려있었다.


 안전 비용을 부담하기 싫은 마음이야 이해할 수도 있다. 
천석꾼 놀부도 밥풀 몇 알이 아까워 주걱을 씻어 흥부 뺨을 때렸다는데, 
삼성 놀부, 대림 놀부, 현대 놀부 등등은 오죽할까. 
그래서 법이 있고, 사회적 기준이 있는 거다. <노동자, 쓰러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 10만 명당 21명이 일하다 죽는 ‘산재공화국’이다. 이 책의 저자는 조선소와 건설현장, 코레일과 KT, 우체국과 택배 퀵서비스 배달, 자동차 공장과 대형마트 백화점, 버스 노동자, 간호 노동자의 노동 현장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기록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위의 문장이다. 산업재해 보험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안전에 관한 규제 사항을 지키는 일은 곧 비용의 문제이다. 지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가능한 규제를 피하고, 애초에 규제를 없애는 쪽으로 나가고 싶은 게 인간적인 생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각종 법이 있고, 사회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규제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무섭게 들리는 이유는 사람의 목숨에 직결된 규제마저 너무나 쉽게 어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자본의 효율성이 우선인 이 사회에서 각종 규제를 피해 가는 꼼수로 한 해 2천 명의 사람들이 일하다 죽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규제 개혁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면, ‘행정규제의 비효율성’, ‘규제 개혁을 통한 일자리 창출’, ‘면세점 사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 목숨이 달린 산업 재해에 관한 규제부터 손봐야 하는 것 아닐까. 청년들의 일자리 역시 생존과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된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 하나가 함부로 규제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노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규제는 너무 많아도 애초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 산재 적용률이 낮은 기업일수록 정부의 지원금을 더 받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하다 다치고 병을 얻은 사람들은 혼자 숨죽여 생활고를 감당하고 있다. 면세점에서 쫓겨난 직원들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벌의 독과점이 아닌 공정 경쟁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장기사업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그 결과 일할 수 없게 된 근로자들의 삶을 책임져주지 못하는 기업에게는 언제나 ‘경제 발목 잡는 규제’라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우리 사회에 정말 규제가 많은가? 그리고 정말 규제가 문제일까? 조금 길지만 아래 인용한 한 가지 사례와 몇 개의 숫자, 그리고 한 사람의 연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대림산업 화학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 6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자 특별근로감독이 들어왔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 1,002건이나 적발됐다. 이 많은 위반 사실을 찾아낸 근로감독관의 노고에 치하를 표하고 싶지만, 그전에 도대체 한 공장에서 천 건 넘는 법을 위반하고 있을 때 노동부와 산 안부 공단 등 정부기관은 뭘 했단 말인가. 현대제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사고사 끊이지 않는 고로 3호기 건설 현장을 조사해달라 노동조합 이근로 감독을 요구했으나, 특별근로감독 대신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수시감독이 실시되었다. 안일한 대처를 넘어 방조 수준이다. 

  방조는 적발 이후에도 나타나는데, 현대제철과 대림이 1,000여 건의 산안법 위반으로 인해 부과된 벌금은 각각 6억, 8억 원이다. 억대의 벌금이 과도해 보이나? 현대가 산재를 숨겨 산재보험금을 감면받은 금액은 한 해 858억 원에 다다른다. 대기업들의 산재보험 특례요율제도를 통한 보험료 감면은 한 해 1조 1,376억 원에 달하고, 이중 20대 기업의 감면액은 3,460억 원에 이른다.(감면액 1위는 삼성으로 868억 원, 2위가 현대와 현대 중공업, 그 뒤를 LG와 SK(233)가 잇는다) 사람 목이 날아간 사고를 낸 후 특별근로감독에 의해 적발된 벌금 금액은 이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 몇 백개의 사업장이 밀접한 공단 지역에 배치된 공무원이 고작 3~4명. 정확히는 전국 1,382,768개 사업장을 근로감독관 439명이 담당하고 있다(2006년 기준)
 누가 안전을 이토록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었을까. 1년 광고비로 1조 원을 넘게 쓰는 대기업이 몇 차례의 대규모 사고를 겪고는 안전관리를 위해 내놓겠다는 돈이 고작 1200억 원이다. 사람 목숨 값이 왜 이리 싼 것일까.
 원칙적으로 모든 산재는 예방 가능하다. 사람이 실수하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산재 예방의 기본이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환경과 구조를 만들어놓고 노동자 실수 운운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면, 왜 유럽 주요 나라 건설 현장에서는 사고가 적은 것인가? 문제는 한국 노동자의'안전 불감증'이 아니다. 한국 기업의 노동자 생명과 건강에 대한 책임 회피, 속도 경쟁, 실적 위주의 관리와 운영이 문제인 것이다. 

-2010년 최악의 살인기업 시상식 중에서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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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자와 양. 영화 <주토피아>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두 마리의 동물이다. 한쪽은 90%의 초식동물, 다른 한 편은 전체 사회의 10%에 불과한 육식동물을 대표한다. 영화 속 사자는 주토피아의 시장(市長)으로 가녀린 양은 그의 비서 역할로 등장한다. 사자는 번번이 양을 무시하고, 일을 떠맡기며, 모욕적인 별명으로 그녀를 호출한다. 자기보다 완력도 권력도 약한 상대를 한 마디로 ‘막 대한다’.   


 그러던 중 사자가 누명을 써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똑똑한 양이 사자의 자리를 대신해 시장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권력을 넘겨받은 ‘한 맺힌 초식 동물’은 사실 무고한 육식 동물들을 사악한 맹수로 돌변하게 만들어 초식동물만의 세상을 만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양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누구라도 없애버리려 들었다. 그녀에겐 그동안 육식 동물들로부터 무시받고 핍박받던 모든 초식동물들의 복수, 즉 정의(定義)를 실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만한 소수와 한 맺힌 다수. 분열된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수사이다. 한쪽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대중이고 반대편엔 그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는 권력 계층이 있다. 주토피아의 양과 사자가 대결하는 구도 역시 이와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70%와 30%, 90%와 10%, 99%와 1% 구분선은 얼마든지 움직인다. 한 개인이 두 집단 가운데 어디에 속할지, 어떤 경계부터 소수와 다수를 구분할 것인지부터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 얼핏 보기에 뜻이 통하는 것 같은 수사는 사실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는 양 쪽 계급 모두에 대한 편견 와 오해를 부추긴다.  


 먼저 ‘오만한 소수’를 묘사하는 가십들은 권력 계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남긴다. 요즘 주기적으로 뉴스거리가 되는 ‘갑(甲) 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물론 우리 현실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양산되었을 때 권력과 힘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회 전체가 좋은 힘, 좋은 권력에 대한 희망과 상상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다 어쩔 수 없어’라는 식의 체념과 회의주의만 남는다.   


 한편, '한 맺힌 다수'는 일반 대중은 대화와 상식, 이성이 통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해 물대포와 시위 경찰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통제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킨다. 결국 ‘오만한 소수, 한 맺힌 다수’라는 프레임이 강화될수록 두 집단 사이의 공생과 화해는 불가능한 과제로 남는다. 회복적 정의가 아닌 특정 집단의 응징과 처벌이 목표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한 맺힌 다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범한 개인은 소수보다는 다수의 입장에 더 자주 속한다. 만화 속 세상에서는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한(恨)이 맺힐 만큼 상처받은 다수는 우리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 양이 나쁜 계략을 꾸몄다고 해서 그간 사자가 그녀에게 함부로 대한 잘못들이 저절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토피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가젤의 공연에 초대된다. 토끼와 여우, 기린과 사자가 어울려 춤추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육식동물 중심의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며, 스스로 90%의 약자를 위해 행동했다고 생각하는 양은 여전히 감옥 안에서 이를 갈고 있다. 양을 비롯한 초식동물이 감내해왔던 부당한 문제들이 있다. 주인공 토끼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해내었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초식동물은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 주어진 운명대로 살다 죽는다.   


 현실에는 구조적 착취와 비정상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다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와 다수를 아울러 올바른 목소리를 내줄 착한 토끼나 여우는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자신의 평균 재산의 10배가 넘는 자산을 가진 후보자들 가운데서 서민 대중의 이익을 대변해줄 대표를 뽑아야 한다. 최악의 실업률, 자살률, 자녀 교육비, 평균 근로시간, 출산율 등 몇 개의 숫자만으로 충분히 그려지는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한이 맺힌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흉악한 범죄자가 된 양처럼 살아선 안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대요. 주토피아의 결말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 대신 ‘새로운 실수를 잔뜩 하라(Keeping those new mistakes)’는 메시지로 끝난다. 영화는 해피 엔딩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실수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웹툰 <파리대왕>은 정치, 경제, 국가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이 만화의 인물들이 이야기하는 삶의 방식이 바로 새로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내용이 주토피아보다 구체적이고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큼 현실적이어서 그대로 옮긴다.   


@ 올레웹툰 <파리대왕>


 이 만화에 등장하는 다수는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돈이 있는 소수로부터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 자신의 꿈을 짓밟힌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극 중에서 누구 못지않게 한이 맺힌 주인공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과 자기 희생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 대신 ‘진정한 복수’를 할 것을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게 복수가 된다는 말.. 어째서 그렇죠?”  

"그들의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자고, 다시 기운 내서 또 열심히 사는 것.  

그래서 지치지 않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환자도 돌보고, 노래도 하고, 투표도 하고..  
그렇게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화를 내는 것.  

무리를 이루는 개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복수지.”  

-올레 웹툰 <파리대왕 - 105화 보통날>  
“고집불통 외길로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설득해 주세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세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들어주세요.  

그리고 그들이 살아왔던 세상과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이어져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여러분이 보고 들은 진실을 공유하세요.   

좀 더 정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세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주세요.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학벌, 고향, 소득 수준, 주거 환경… 
어떻게든 사람들을 갈라놓으려는 문화와 직접 대화해 주세요.  

우리를 불필요한 경쟁으로 줄 세우지 못하게,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지 못하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이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할 수 있게  

우리 스스로와.. 싸워주세요”    

-올레 웹툰 <파리대왕 - 104화 지하 강당 연설문>    

 지치지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살 것, 그리고 사람들을 갈라놓으려는 문화와 직접 대화할 것.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와 싸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일을 하고, 투표를 한다. 자신의 방식대로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결정에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내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이를 공적 영역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정치적 민감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수가 모인 사회. 소수는 오만하다는 편견과 다수는 비이성적이라는 편견을 똑같이 거부하는 사회. 우린 그런 곳을 꿈꾸어야 한다.


 고집불통 외길로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세대가 살아왔던 세상과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내가 보고 들은 진실을 누군가와 나누고, 더 정상적인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번거롭다. 그런 생각보다 힘든 일을 해낸 다음엔 더 큰 변화를 계획할 자신감이 생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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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영화 <동주>

 최근 영화 <동주>를 본 사람이라면 그의 시가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던 그는 누구보다 어렵게 시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시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국가 권력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 바로 법 조항에 따라 쓰여지는 법조문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법조문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대학시절 ‘김수영과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집을 뒤적이다 늦은 밤 도서관 문을 나섰’다는 25년 베테랑 기자 권석천은 그의 책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주장을 하기보다 논쟁하는 이들의 말을 귀담아듣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80 여 개 칼럼을 통해 어렵게 제 목소리를 들려준다.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기보다 ‘정의를 부탁한다’는 그의 책 제목이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법을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25년간 기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는 내내 방황하고 애쓰고 헤매었다는 그의 솔직한 자기고백이 담긴 서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결문을 쉽게 쓰는 법조인이 늘어나는 현실을 걱정한다. 그는 먼저 한 편의 칼럼에 특목고 – 명문대 출신의 법조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몇몇의 목소리를 담았다.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노력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판결문을 쓰는 법조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법조문이라는 기존의 틀을 넘어서 더 큰 정의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객관성, 중립성, 논리성, 합리성 너머의 가치이다. 솔로몬의 재판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판결 속 ‘작은 정의’를 통해 생모가 누군지 밝혀내는 ‘큰 정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대원외고-서울대 나온 판사는 판결문은 잘 쓰는데 누가 승소인지 판단을 잘 못한다” (한 부장판사의 말)

“대원외고요? 일 잘하고 예의도 바르죠.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어떤 게 논리적이고 판례에 맞느냐부터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재판기록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파 들어가고 누굴 보호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아요. (법원장 출신 변호사 말)”


큰 정의는 법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판결문이 쉽게 써져선 안 되는 이유는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과 화해, 반성이라는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기존에 없던 창의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피해자와 가해자 나아가 사회 전체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법이라는 형식 논리에서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존의 논리와 합리성을 뛰어넘는 시도들은 그것을 둘러싼 주체들의 이해와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헌법’이라는 위대한 규범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의 가식에는 회의적 태도를 취해도 되지만,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냉소적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


 나는 일찍이 더 큰 정의를 위해 서로에게 양해를 구하며 법적 상상력을 발휘한 판결문들을 알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미국 연방법원에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면서 내린 판결문이 있다. 작년 6월 미국의 연방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발표했다.


 결혼보다 심오한 결합은 없다. 결혼은 사랑, 신의, 헌신, 희생 그리고 가족의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관계를 이루면서 두 사람은 이전의 혼자였던 그들보다 위대해진다.


 오랫동안 동성애 결혼을 반대해왔던 미국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여전히 일부 기독교 보수 단체들은 연방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있다. 찬성 5명 반대 4명이었다. 단 한 사람의 지지를 얻어낸 것만으로 많은 것이 바뀐 것이다. 동성애 결혼을 허용하는 판결문에서는 ‘가족과 결혼’이라는 더 큰 가치로 동성 간의 사랑을 묶어냄으로써 반대론자들을 설득했다. 동성애자들이 청원하는 이유는 그간 ‘이성 간의 결합’으로 정의되어왔던 결혼 제도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보수주의자들 이신성 시 여기는 가족과 결혼을 깊이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그것을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법적 수사는 보수적이었던 한 대법관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더 큰 정의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내는 상상력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기념 집회에 모인 남아공 사람들

 이보다 오래된 사례로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가 있었다. 나는 인종차별 정치 아래 잔혹 행위의 가해자가 진실을 밝힐 경우, 그의 죄를 용서해주기로 한 그들의 합의야말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실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응보가 아닌 화해, 처벌 대신 진실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국 민적 합의를 이루었다. 기존의 법적 논리로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끔찍한 과거를 청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도 사람들 앞에 자신이 저지를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 용서해주었다. 피해자는 작은 사람들을 위한 위원회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진실을 말할 기회를 얻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적 사건의 증인이자 책임이 있는 관계자가 되었다. 가해자 역시 스스로 저지른 비 인륜적이 고잔 혹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에서 ‘수치의 처벌’을 충분히 감당하게 되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나아가 전 세계가 공통의 역사를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한 피해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자가 결혼 제도와 가족 공동체를 신성시 여긴다? 작은 사람들을 위한 위원회와 ‘수치의 처벌’? 기존의 판례와 법조문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조합한다고 해서 이런 판결문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주어진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치울 고민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답안일 것이라 생각한다.


판결문은 한 편의 시만큼이나 씌어지기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법의 논리가 어떤 문제에든 쉽게 적용되면 어떤 폐해가 생기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권석천 기자는 법을 공부한 사람답게 한국의 주요 법적 분쟁 사건에 대해 빠짐없이 논평을 남겼다. 2013년 서울 중앙지법은 판결문을 통해 종북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북한과 연관되었다고 인정된 사건들에 있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사회세력


 앞의 두 문장에 주목하자. 법적 합리성을 앞세운 모호하고 광범위한 정의만으로 국민 대다수를 막연한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게 판결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광우병’ 보도를 했던 MBC <PD수첩> 제작진들은 형사재판에 넘겨졌지만 헌법불합치, 1,2,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논객 미네르바 역시 허위사실 유포죄로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무죄, 위헌으로 풀려났다. 판결문에 앞서 법의 잣대가 일반 시민들에 게까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1심 2심 3심 무죄 판결을 받은 시사고발 프로그램
 자기 내부의 합리성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재판 과정은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가설들로 시작해 의심과 논쟁을 거쳐 어떤 실수의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에 판결문으로 작성된다.-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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