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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밀란 쿤데라가 "자신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밀어부치기 위해 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비웃었다.
그 말의 주인공이 소위 '밀란 쿤데라'이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만약 동일한 언설을 했다면 수많은 곳에서 탄식과 동시에 돌이
날라왔을테니...
그런데 이제 나는 그의 언설이 다만 세게적 명성을 얻은 대작가의 섣부르고
교만한 소리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입장에 서있다.
어릴 적에는 전혀 공감할 수도, 이해 할 수도 없었던 삶을 사는 소설 속
인물들로만 보였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네 명의
삶에서 어느새 나의 삶을 읽어낼 수 있는 늙수그레한 나이에 접어드니
온전히 그의 말을 수긍할 수 밖에 없다.
50줄의 작가가 일구어 낸 삶의 고통과 철학을 담은 소설이
10대와 20대, 혹은 삶을 반성할 여유가 없이 돈에 쫓기며,
혹은 환장해서 사는 족속들에게도 온전히 이해가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공평한 처사는 아니다.
김영하가 어느 책에서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를 평하며 등장하는
십대 천재 흑인 작가 캐릭터에 대해 불만을 토하며
시라면 몰라도 소설에 있어선 신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 동감한다.
소설의 삶의 경험의 축적이고, 경험은 월반이 가능한 지적 게임은
아닌 것이다.
월반을 허락하지 않는 문학이란 측면에서 소설은
독자들이나 작가들에겐 그 만큼 매력적인 동시에
냉혹하게도 자신의 바닥을 들추는 장르이다.
누군가 이 작품을 어렵고 난해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주인공들의 삶에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로브그리예, 보르헤스, 혹은 제임스 조이스 같은 난해함과
동일선 상에 있다고 누군가 거창하게 평가하고 암시해
다른 이의 기를 죽인다면,
그 말을 하는 자가 만약 문학 평론을 밥줄로 삼는 이가 아니라면
어줍잖고 하찮은 현학쟁이거나,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불성실한 독자일 뿐이라고 말해 주겠다.
이 작품에 난해함이 있다면 삶을 고민해본 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삶의 난해함일 뿐이다.
이 소설은 살아 온 만큼 읽히는 소설이다. 그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가볍고 만만하냐고?
아니다.
소설 속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소설적 담론의 틀을 부수고 나와 삶으로 향한다.
그리고 독자의 삶은 다시 소설 속의 이야기들로 환원된다.
소설 앞에 등장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작가의 허세라든가,
작품과 겉도는 헛소리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는 소설이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의 묘사와 철학은 정녕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세계를 다르게 보게 하는지 알려준다.
그런데 그 방식이 다른 작가들처럼 현란하거나 생뚱맞지 않다는 거다.
이해할 수 없는 미궁같은 차원에 머물며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지도 않다.
이 작품의 깊이와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