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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샐린저가 호텔에 투숙해 일주일만에 써내렸다는 이 소설은
어느 조사에선가 미국 여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설로 등록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단다.
통계나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항상 협소한 조건 속에서
조사자의 목적이나 의도를 배제하지 못하는 불순하고 무의미한 숫자놀음
(이 통계의 수치나 숫자놀음은 통장의 잔고만큼이나 바보들에겐 큰 의미를
부여하겠지만)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미국의 여대생 선호도 1위나 한국의 여고생들의 필독서로 선정되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여간 대중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성공한 이 소설은
책과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교양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는소설들의 목록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은근한 압박감을 안겨주는 소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의외로 읽기엔 많은 고민이나 어려움을 요하지 않는 소설이다.
쉽게 읽힌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터져나오는 블랙코미디적인 웃음과
비아냥은 꽤나 몰입도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심오한 사유나 처절한 고민에서 쓰여진 글이 아니라는 것은
책 첫장을 열면서 바로 느낄 수 있으니, 가볍게 도전해 볼 것.
하지만 다 읽고 났을때
가슴에 얹히는 묵직한 느낌은 분명히 남는다.
그것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어설픈 아웃사이더의 희극적인
자기고백이자 실패가 예정된 한시적 반항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혁명은 항상 묵직함을 남긴다.
모든 청년들이 통과의례로 겪었을 법한 상황,
즉, 속물들의 세상을 욕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속물이 되어가고 있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은 인간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법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위대한 개츠비>>를 쓴 핏츠제럴드에
대한 존경과 멸시가 교차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콜필드의 입을 통해 말하는 그의 형 (내가 파악한 바로는 핏츠제럴
드)에 대한 평가를 보다보면 존경과 애증이 공존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 콜필드의 형이 바로 피츠제럴드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는 이유는
소설에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찬사(콜필드의 형이 쓴 단편소설에
대한 찬사와 대응관계)이 있거니와, 실제 피츠제럴드도 소설을 쓰다
헐리우드으로 가서 시나리오를 쓰며 그의 재능을 낭비한 이력(콜필드의 형
도 헐리우드에 가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고, 작가는 콜필드의 입을 통해
소설 내내 영화나 시나리오를 경멸한 다. 심지어 콜필드는 형의 행동을
'창녀짓'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이 소설은 <<위대한 개츠비>>와 묶어 읽으면 더욱 깊어지고
재미있어진다.
한 가지 더,
미국의 여대생 만큼이나 이 소설을 좋아했던 주인공이 나온
영화가 떠오른다.
바로 맬 깁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컨스피러시>(1997)란 영화인데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떠벌이 택시기사이자 줄리아 로버츠를
스토킹 하는 주인공이 <<호밀밭 파수꾼>>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영화 자체는 별 재미가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라)

그런데 이 설정에는 중요한 복선과 컨텍스트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호밀밭 파수꾼>>은 암살자들이 즐겨읽는 책이란 소문.
비틀즈의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이 잡히고 난 후,
"모든 사람은 <<호밀밭 파수꾼>>을읽어야 한다"고 외쳤고, 그 후 소문이
부풀려져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몰린(?!) 오스왈드의
집에서도 이 책이 나왔다는 소문, CIA가 암살범을 육성하기 위해
이 책을 사용한다는 소문까지나돌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러한 황당무계한 소문과 풍문, 음모론을
대놓고 만든 영화가 <원제:Conspiracy Theory(음모론)>이니
영화에 <<호밀밭 파수꾼>>이 왜 등장해야 하는지 감이 오리라.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또 다른 영화는
한때 키치적 시선과 언어로 80년대와 90년대를 유희하던
악동 시인이었던 유하가 영화감독이 되면서
그가 제일 능통해있던 감성으로 가장 그답게 만들어낸
영화인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학교를 자퇴할 결심으로 나오며 외친
"대한민국 학교들, 다 좆까라 그래."와
<<호밀밭 파수꾼>>의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 당하며
마지막으로 외치고 나오는
"바보들아, 잘들 퍼자라"란 외침은
내 귀에는 동일한 절규로 들렸다.
그런데 그렇게 학교를 박차고 나온 콜필드와 권상우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이건 나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그리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