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이 잠이 나를 이겼다. 어느 날 죽음 역시 그러하리라. 나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기 위안 단계에 이른 나는 과부 이야기를 하려 했다. 조르바는 그 긴 팔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닥쳐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조르바는 무아지경에 빠져든 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저 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야 말할 기분이 내킨 모양이었다. 「두목,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따사로운 밤공기 속에서 그윽하면서도 진지했다.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떨렸다.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내가 대답했다. 부끄러웠다.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받고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모르신다!」 조르바는 놀라움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모든 빌어먹을 책들… 그것들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건 왜 읽어요? 책이 그런 걸 알려 주지 않으면 도대체 뭘 알려 주는데요?」 「인간의 당혹감에 대해 알려 주죠. 당신이 나한테 던진 바로 그런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당혹감 말이에요.」
「두목, 제발 설명해 주시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오랜 세월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어요.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3톤은 족히 씹고 또 씹었을 거예요! 거기에서 뭔가 얻어 낸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너무나도 깊은 비통함이 묻어 있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 이 사람에게 대답할 능력이 내게 있었다면! 내가 깊이 느끼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은 〈지식〉도, 〈미덕〉도, 〈선(善)〉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어떤 것, 바로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사실이었다. 「대답해 줄 수 없어요?」 조르바가 초조하게 물었다. 나는 그 신성한 경외감의 의미를 이해시켜 보려 했다.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들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들이고요.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잎의 맛을 보고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알아냅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비명을 지릅니다. 어떤 사람은 ─ 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뭐가 있을지 모를 허공을 내려다봅니다. 오싹 전율이 일어납니다. 저 아래에 소름 끼치는 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멀리서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이 스며올라오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두려움을 자아내는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르바가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끊어 버린 것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의 침묵 때문에, 영원하고도 부질없는 질문들이 다시 한 번 내 내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한 번 내 가슴은 고뇌로 차올랐다. 세상이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슨 수로 우리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달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 위에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기나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까? 우리가 불멸에 대해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어떤 불멸의 존재를 섬겨서가 아닐까?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조르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버팀목을 대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 둔 터였지요. 나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조르바의 이 짧은 이야기에서 나는 강력하고도 맹목적인 필연이라는 것에 맞설 때 인간이 어떤 태도와 어조를 취해야 하는지를 감득했다. 나는 해변을 따라 잰걸음으로 걸으며 저 보이지 않는 적과 대화를 했다. 나는 호령했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어. 나를 뒤엎는다니, 어림없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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