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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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G폰을 쓰던 시절에는 하루종일 만나고 헤어진 친구와 밤새도록 통화를 하고도 이야기가 남아 내일 만날 약속을 잡곤 했다. 하는 얘기는 대부분 비슷하거나 지난번에 했던 그 얘기지만 뭐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귀가 뜨거워질때까지 깔깔거렸다. 요즘은 스마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 그 작은 화면을 이러저리 움직이는 일로 밤이 깊어지고는 한다. 핸드폰 화면이 쏟아내는 무한한 정보와 일방적인 이야기들이 의미 없이 느껴지는 어느 날엔 옛날 친구들과 밤새 떨던 수다가 그리워지곤 한다. <책이나 읽을걸>은 그렇게 누군가와 수다를 떠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를 쓴 유즈키 아사코가 쓴 에세이니 대화상대로는 찰떡이다. 뭔가 말이 잘 통할 것만 같다.

 

저자가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의 고전소설을 읽고 잡지(우리나라로 치면 샘터?)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아주 오래된 고전이 아닌 근현대소설을 주로 다뤘고 그중에서도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가 많다. ‘고전 속의 그녀들과 나눈 주관적인 수다라는 표제 문구는 이 책의 모든 것을 명확히 압축한 문장이다. 나도 기꺼이 그 수다에 동참하기로 한다.

 

 

p.13  수도원 출신과 여학교 출신의 공통점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열어주는 너그러움,

        ​이성에게 경계심이 강한 듯 보이면서도 살짝 바보스러운 순진함,

        ​넘어지더라도 꼭 뭔가는 손에 쥐고서야 일어서는 묘한 강인함이다.

 

몇 페이지 읽지 않고도 이 수다가 얼마나 즐거울지 무척 흥분되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수도원 출신의 주인공과 여중, 여고 출신의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 부분부터 맞아,맞아너무나 완벽한 공감이 이루어진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마음껏 야심과 열정을 부린 주인공을 통해 일말의 해방감을 느꼈다는 부분도 쉽게 수긍이 갔다. 나도 요즘 우리는 너무 소진되었다는 핑계로, 권태를 권장하고 손쉬운 위로만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오만과 편견>의 로맨틱한 달콤함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느꼈던 불편함도 <나나>를 한 소녀의 성공스토리로 읽겠다는 그녀의 이상한 다짐에도 수없이 맞장구를 치며 읽어내려갔다. 아는 이야기보다 모르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그나마도 고전 요약본으로 주제만 간신히 기억하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무엇보다도 고전 속 주인공들을 매우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마치 옆집 언니처럼 아는 동생처럼 그들의 삶을 기꺼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따뜻하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고전에 대한 사회적 평가, 관습적 통념에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의 뜻밖의 생각들이 내 좁은 시야를 트여 주는 느낌도 들었다. 고전의 무거움도 전혀 없다. 그러니 오늘은 침대맡에서 핸드폰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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