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친절하다. 상세한 설명이나 섬세한 묘사는 없다. 인물도 배경도 단문형 문장속에서 간단하게 사라지거나 생겨나거나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100페이지를 쏜살같이 관통한다. 이토록 새롭고 이상한 이야기라니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 이상한 이야기에 순순히 이끌려가고 있는 나도 좀 이상한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나의 마지막 히어로>, 저자는 나의 미천한 독서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생소한 이름 엠마뉘엘 베르네임이다. 프랑스의 3대 문학상으로 불리우는 메디치상의 수상작가인 그녀는 100쪽 남짓한 소설 다섯 편만을 남기고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시나리오나 대본을 주로 접했던 이력 때문인지 그녀의 길지 않은 소설은 어느 시나리오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의 마지막 자전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녀가 이미 살았거나 혹은 살고 싶었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나의 마지막 히어로>의 히어로는 다름 아닌 실버스타 스탤론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땀에 절은 런닝셔츠,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근육질 몸, 눈은 반쯤 뜨다 만 것 같은 스탤론의 외모는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한 눈에 반할 정도는 아니다. 주인공 리즈가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록키3>를 보고 불현듯 스탤론의 팬이 된 것은 그의 탄탄한 팔뚝 때문이 아니라 영화 속 록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록키 발보아 처럼 다시 일어나 가슴 뛰는 삶을 살아낼 것이라는 희망같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p11. 걸음을 뗄 때마다 허벅지 근육, 종아리 근육이 느껴졌다.

       허리 무릎 발목의 관절이 각각 작동했고,

       ​보도의 탄성이 발바닥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뛰지 않았지?

       마르샬 박사의 병원에서 일하는 시간과 미셸과 보내는 시간 사이에

       리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p.15  영화 초반의 록키 발보아처럼 그녀는 되는 대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    스물다섯 살이었다.

​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리즈는 <록키3>를 기점으로 새로운 삶을 꾸리기로 한다. 5년만에 의과 공부도 다시 시작한다. 그녀는 록키 발보아 처럼 다시 일어선다. 그녀의 새로운 선택을 비웃는 가족, 애인은 단칼에 잘라낸다. (특히 이 부분이 얼마나 통쾌하던지…) 리즈의 삶은 그녀가 선택한 일과 사람으로 다시 채워진다. 새 연인 이 생겼고 의사가 되었고 차례로 두 아들이 생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스탤론의 영화를 모조리 챙겨보리라는 최초의 다짐을 지켜낸다. 스탤론 덕분에 리즈의 인생은 달라졌고 이제 그녀의 삶은 망할 위기에 처한 영웅을 구하기 위해 통장을 만들 정도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있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다소 콩트적인 느낌이 든다. 얼핏 새드엔딩처럼 보이지만 실은 해피엔딩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리즈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아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다. 거기에 스탤론의 영화들이 배경처럼 지나간다. 사실 스탤론은 상징일뿐, 그녀의 인생을 본인의 의지대로 지켜낸 것은 그녀 자신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날 리즈가 <록키3>를 보지 않았더라면, 록키 발보아가 챔피언이 되는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리즈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그 한 순간을 운명이라고 부른다면 스탤론, 그는 리즈의 마지막 영웅이 틀림없다.  


이 책에는 나처럼 엠마뉘엘 베르네임이라는 이름이 낯선 독자들을 위해, 영화계와 문학계를 아우르는 대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지적인 대화를 읽다보면 <나의 마지막 히어로>에 대한 다른 면모들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저자의 전작들이 아주 궁금해진다. 편독 방지를 위해 해외 소설도 많이 읽어봐야지 했던 참에 눈여겨 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