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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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라는 이름 석자를 들으면 가슴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것은 동경인 것도 같고 슬픔인 것도 같고 그리움인 것도 같다. 엄마뻘의 노작가가 이렇게까지 애틋한 것은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 자체가 나에게 준 울림이 그만큼 큰 탓일 테다. 고등학생이 되고 그 다음해였던가, 처음으로 <나목>을 읽고 이렇게 슴슴하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이야기로 문학소녀들의 마음을 흔들던 신경숙, 은희경 같은 여류 작가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류 속에서 발견한 뚝배기 같은 감동이 왜인지 쉬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 이후로도 일상의 서사를 감동으로 빚어내는 그 솜씨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작가의 책을 찾았고 <나목>으로 시작된 인연은 돌아가시기 전 펴낸 에세이까지 줄곧 이어졌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박완서 작가가 1981년 펴냈던 콩트집의 개정판이다. 작가가 문단에서 아직 신인이던 70년대, 기업 사보에 연재하던 콩트를 모아낸 것으로 콩트라는 입에 붙지 않는 말보단 짧은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한결 편안하게 책을 펼칠 수 있다. 나로선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접할 생각을 하니 설레는 와중에도 아까운 마음이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로 한다.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 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었다.

p.96  <아직끝나지 않은 음모3 >

 

 

 



이 책은 1970년대를 살아온 우리 엄마의 모습을 담아낸 것만 같다. 엄마는 아들 형제에 밀려 대학을 갈 수 없었고 시집을 와서도 딸만 둘을 낳았고, 서울살이를 동경하여 서울 변두리의 가난한 셋방살이를 시작했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모진일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딸들의 국민학교 졸업 즈음엔 첫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소설집에는 그때의 사회 분위기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엄마의 생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리고, 생각하고,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별반 다르지 않은 지금 나의 삶에 대해서도

책을 읽다보면 시대를 앞서는 글을 지었다는 작가의 수줍은 고백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놀랍도록 변한 것이 없는 작금의 현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아파트 열쇠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부모가 부재한 시간들을 홀로 견딘다. 아파트 열쇠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읽으면 태초의 고독한 현대인들이 잉태된 곳이 아파트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처럼 사내에서 결혼을 하면 당연히 여자가 회사를 관둬야 했던 시절을 지나왔지만 지금도 시기의 문제일뿐 결혼한 여자는 여전히 회사생활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일식>편을 보면 지금 유행하는 ‘SKY 캐슬의 배경처럼 사교육 열성이 생생하다. 그 연장선 격의 이야기로 <그림의 가위>를 보면 학벌위주로 재편된 청년 실업이나 청년 좌절의 시대가 지금까지 진행중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와 형과의 끈, 부모와의 끈, 서울대학과의 끈을 끊어버리고 탯줄 끊긴 영아처럼 새롭고 고독하고 자유롭고 싶었다. 고고의 소리처럼 싱싱한 자기 목소리를 갖고 싶었다.

p.130   <그림의 가위>  中


​  블랙 코미디처럼 위트 넘치는 이야깃거리들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현실까지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마주치는 나와 내 이웃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이 작가의 펜끝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나목그 자체인 작가의 삶을 떠올리면 그 안에서 일궈낸 작품 하나하나가 깊은 굴곡 사이에서 건져올린 삶의 정수 같은 느낌이다. 그 혹독한 삶 속에서 일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끄집어 내기까지 노작가는 얼마나 자신의 감정들을, 시간들을, 깍아내어 왔던 걸까 오늘밤, 나와 나의 아름다운 이웃과 그 이웃의 이름인 박완서 작가를 생각하며 조금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려본다.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p.321  <노을과 양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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