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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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은 여러모로 불편한 주제다. 그래서 페미니즘이라던지, 동성애 등의 주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외면하는 방법을 택했다. 불편하더라도 똑바로 직시하는 현실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이 접하게 된 <19호실로 가다>는 무척 강렬하고 노골적인 책이었다. 도레스 레싱의 단편집인 이 책은 페미니즘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영국에서 발표된 작품들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중심이었던 미국과 영국, 그 중심인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당시의 혼란과 불안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여전히 '야만적인 구세계'에 살고 있는 남성들의 욕망을 비꼬고 오히려 굴복시키는 사이다 같은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빼기'의 바버라가 그랬고, '옥상 위의 여자'의 그녀가 그랬다. 여성 작가가 쓰는 남성 화자의 묘사들은 하나같이 완벽하게 그럴듯한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그 남성적 우월감에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까지 남성의 목소리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진짜 남성의 언어라서가 아니라 여성(작가)이 경험한 남성의 언어 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은 남성 독자의 의견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P.290  처음에 나는 어른이 된 뒤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결혼했지.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그 뿐이야.

 

   <19호실로 가다>는 지금 내 상황과 맞물려 가장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문장 마다 고인 불안과 고민의 깊이가 감정을 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삶이 눈물겨웠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젖먹이 아이와 함께 해야하는 엄마들을 아무도 모르는 19호실로 데려다 주고 싶었다. 그 깊은 절망과 공허보다 더 암담한 사실은 1960년대를 사는 수전과 21세기를 사는 나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 대 영국'처럼 이데올로기나 계층에 대한 부분도 다루고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페미니즘적 메세지들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성의 자유'는 남녀가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일과 결혼은 여성의 일생을 좀먹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여성도 일을 해야한다, 여성의 모성은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다 등등.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되는 이야기들이지만 1960년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존 관습사회에 던지는 핵폭탄 같은 작품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지금의 페미니즘을 외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던 초기 여성인권주의에서 많이 변질된 (역)성차별의 다른 이름 같은 느낌 때문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역할은 복잡하고 극변하는데 반해 서로 다른 성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한 발 정도도 나아가지 못한 모양새다. 그녀의 노골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불편한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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