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조이스 박 지음 / 제이포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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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더해질수록 밝아지지만, 색은 더해질수록 어두워진다. 동화를 다시 읽는/쓰는 책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는, 한 군데에 여러 겹의 물감이 덧칠되면 색이 검정에 가까워지듯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 타의적으로 덧입혀진 붓질들이 차곡차곡 쌓여 속 모를 검정으로 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혹은 다른 의미없는 무언가를 위해 입맛대로 조정되고 조종된 검정 덩어리들이 여성들을 어떻게 옭아매어 왔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적 독해 없이 무비판적으로 동화를, 동화 속 여성상을 흡수하는 것은 얼마나 유해한가.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의 관점에서 고전적인 이야기 타래를 새로이 풀어나가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시도이지만 요즘들어 보다 대중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든 활발하게 읽히고 다시 읽히고 다른 관점에서 또다시 읽힐 때에야 시간이 흘러도 죽지 않고 새로운 숨을 쉬며 살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오래된 동화들에 덕지덕지 붙은 굳어 버린 물감들을 떼어내고 새 숨을 불어 넣는 -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힘이 될, 휴양이나 치유를 넘어선 회복을 일으킬 숨 한 모금을, 켜켜이 어둠이 쌓인 숲 속을 대범하게 탐험할 힘을 실어 주는 숨을 - 책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는 그런 의미에서 동화들이 늙어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 이 책의 부제는 '동화 여주 잔혹사'다.

📍 백설공주의 어머니 왕비는 ...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의 외모를 아이에게 욕망하면서 ...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마치 로맨스 파괴자라도 된 듯하다. 하지만 로맨스라는 기제에 기만당하면, 자신의 욕망 대신 남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뼈아픈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나 성애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p.32~38)

📍 아버지가 아무리 탑에 가두려고 해도, 로젤루핀은 뜨개질을 하는 자, 이야기를 짓는 자, 목소리를 가진 자다. 자신의 언어를 소유한 자는 현실의 권력에 "No!"라고 외칠 수 있다(p.219~220)

📍 그러나 여자 혼자 변한다고 해서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남자도 자기 몫의 광야를 거쳐야 한다. (p.126) ... 그러니 부디 자기 몫의 광야를 제대로 거쳐서 내적인 통합을 이루길, 평화와 안정의 성에 들어가기를. (p.129)

*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p/C8J6_bvSbMu/?igsh=MTF4bW1rZ3ZpM3Ry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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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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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사랑에 관한 책이다.

배리 로페즈는 이 땅에 굳건히 발 붙인 채 - 그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한 자 한 자 담아내며, 또한 팔레스타인의 시민들과 사냥당한 야생동물들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상흔을 담아내며 - 회복과 자연을 이야기한다. 그가 겪은 일들에 지나간 나의 고통들을 겹쳐 본다. 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자각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말 없이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감각하게 해 주는 바람과 파도와 홍수를 마주했다(p.108). 그의 글에 담긴 것은 "사후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세의 여러 장소와 현상(p.15)"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이다. 나의 세계가 저 너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일 때 신이 온전히 현현할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은 배리의 에세이에서 안을 향하는 시선과 바깥을 향하는 시선이 결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적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한 호흡으로 이야기(p.11)" 된다. 이 호흡의 규칙을 잊어버리면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이 필연적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호흡이란, 가만히 내버려져 인간의 시혜적 손길을 원하는 가련한 자연에게 인간이 불어넣어주는 숨결이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 그러나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악마 같은 인간의 손길로부터 유린당하는 전형적인 수동적 자연의 이미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극적 환상에 불과하다.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만큼 자연이 살아 있다(그 반대도 성립하여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배리의 에세이에 담긴 자연은 우리의 호흡이 들숨과 날숨으로 자연스레 짝을 이루듯 우리의 존재 내외부를 이루는 근간이다.

그러니 배리의 치유가 단순히 자연의 풍광에 감탄하는 '힐링' 여행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가 목격한 자연 속의 순간들로부터, "우리가 이 행성에 저지른 행태(p.144)"와 희생자들의 흔적으로 남은 "광기와 잔학(p.155)"이 어떻게 우리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윤리를 멍들게 하는지 이야기하며, 씨앗에서 튼 싹이 햇빛을 따르듯 우리의 삶이(생존이) 향하여 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준다.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는 분들이, 자연 안에서의 소통과 치유를, 한 인간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굳건히 두 발로 설 수 있는가를,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영원히 "사랑에 실패(p.251)"하지 않게 해줄 희망을. 그리고 그 누구도, 무슨 일을 겪더라도, 돌이킬 수 없이 산산히 부서지지는 않으리라고. "결코 사라질 수도, 파괴될 수도 없(p.69)"는 태양과 땅처럼.

#도서제공 #배리로페즈리뷰대회

https://www.instagram.com/p/C1Q8ufQynGW/?igsh=Z2p3aXpvZzZhdD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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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 - 우리의 삶에서 상상력이 사라졌을 때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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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땅에 진심어린 애정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매매의 대상인 부동산도, 기계적으로 출퇴근하는 공간도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 숨쉬는 땅을 마주해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하는 책, '북극을 꿈꾸다'.

무엇이든, 다르게 보면 다르게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밝은 아침 해를 지겨운 출근의 신호가 아니라 넘치는 생명의 원천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얼굴에 느껴지던 빛의 감촉을 기억한다. 풀을 뜯는 카리부들 사이로 갑자기 질주하던 새끼들, 그리고 결연한 새들이 품고 있던 따스한 알의 느낌도. 그제야 나는 햇빛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알게 되었다. 내 관습적인 인식으로 보자면 말도 안 되지만, 한밤중에도 태양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너그러운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겨울의 증거를 그처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땅에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연민이라니."

배리 로페즈는 인간의 판단과 측정 너머에 존재하는 대지를 기록한다. 때로는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있는 듯한, 때로는 우리의 인지를 한참 벗어나는 거대한 하나인 듯한 북극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무엇이든 간에 북극은 그렇게 거기 있다.

✏️ "그리고 북방의 상업적•산업적 개발과 그곳에 적용된 경제학의 타당성에 관련된 우리의 개념적 문제들은 대지 자체의 근본적인 차이, 즉 빛의 주기와 종류에 관한 우리의 온대적 선입견 같은 미묘한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다. 온대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일정한 생활 유형들, 여름밤에 실제로 해가 지고, 어스름에는 매미가 귀뚜라미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람들이 현관 앞 베란다에 나와 앉는 그런 일들이 북극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 역시 온대적 인간으로서 '북극을 꿈꾸다'를 읽으며 내 과잉된 자아가 책에 아로새겨진 북극을 의도적으로 곡해하지 않을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곱씹는 독서의 시간이었다. 전형적으로 혹독한 땅, 혹은 풍부한 자원의 땅 따위로 정의되곤 하는 북극의 서사를 윤리적인 애정으로 되받아쓴 저자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 "지구의 다양한 대지를 개인적으로 알기는 힘들다. 땅들은 야생동물만큼이나 대화하기 힘든 존재들이다."

배리 로페즈의 책을 읽을 때마다 물 자국 같은 슬픔과 사랑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https://www.instagram.com/p/C4WrQlSyYYK/?igsh=bTRqZmduejdpc2c5

#도서제공 #배리로페즈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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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RY : Vol.1 사랑의 순간들로의 여행
바른생각 편집부 지음 / 콘텐츠스튜디오 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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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친구들과 모이면 늘 하던 얘기가 바로 연애 얘기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수다의 원천이고 언제나 꿀잼인 '친구 연애 얘기'. 그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책으로 담아낸 바른생각의 잡지 <POETRY: Vol.1 사랑의 순간들로의 여행>입니다.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다양한 여러 커플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어요. 어떻게 만났어?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왜 싸웠어? 애인 어떤 점이 좋아? 같은, 친구들 얘기를 듣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각기 다른 계기로 만나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온, 함께 단맛과 쓴맛을 다 봐온 커플들의 연애 얘기에, 좋았던 데이트 추천 꿀정보까지 들어있더라고요.

⠀안희연 배우님(EXID 하니)의 인터뷰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호주 여행을 추천하셨던 거였어요. 마침 저도 작년에 남자친구와 호주에서 일 분 일 초가 아까울 만큼 즐거운 여행을 했어서 너무 공감이 되었고요(호주를 추천한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POETRY 매거진을..😉)

⠀서울 곳곳에 위치한 재미있는 브랜드(브루어리, 제로웨이스트숍, 독립서점 등등) 이야기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이제 낮이 길어지고 기온이 높아져 점점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되어가고 있으니, 데이트할 때 이 잡지에 소개된 장소들 하나하나 남자친구와 도장깨기 해보려고요!

⠀거기에다 시(황혜경 시인), 짧은 소설(우다영 소설가), 할머니들의 연애조언까지 알차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쩐지 이 책은 여행길을 떠날 때 한 손에 가볍게 들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잡지의 제목에 '연애'와 '여행'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죠. 연애와 여행은 닮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연애 스토리를 듣는 건 때로 그들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해요.

⠀따뜻한 봄, 추위에 웅크렸던 몸을 깨우는 부드러운 봄바람 같은 <POETRY: Vol.1 사랑의 순간들로의 여행>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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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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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우리 모두는 은연중에 생이 지금의 모습으로 지속될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지닌 채 살아간다. 만약 당장 죽는다면 마지막 숨을 뱉는 순간까지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결정들로 삶을 채워나가면서.

✏️ [잭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가장 참기 힘든 게 뭔지 아나? 언젠가 죽는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거야. 변화를 모색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거나 다른 생을 꿈꿀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리란 걸 알면서도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양 살아왔다는 거야."]

✏️ [최소한 연봉 50만 달러, 수많은 특권...... 그러나 그 모든 건 내가 뷰파인더 뒤의 인생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은 것들이었다. 잭이 오래 전 맥두걸 가 화실에서 꿈꾸었던 인생, 이제는 백일몽이 되어버린 인생, 안정된 삶을 선택하는 대가로 포기한 인생.
잭은 그 안정된 삶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소설의 첫 부분에서 꿈을 좇는 가난한 삶과 꿈을 버린 부유한 삶 사이의 대립구도가 지어지는 듯 하다가, 주인공이 후자를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 ['제가 전에는 그토록 하찮게 생각했던 삶을 제발 되돌려주십시오. 아무런 기쁨 없이 멍했던 통근길, 한심한 의뢰인들을 바라보며 보낸 지긋지긋한 근무 시간, 집안 문제, 부부 문제, 불면의 밤, 내 아이들을 제발 다 돌려주세요. 더 이상 다른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택한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십시오.']

답도 없이 망해 버린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심지어 죽음으로써 그것을 살려내려고도 하다가, 그렇지만 정말로 죽지는 않고(아마도?) 어떻게든 분투하는 주인공의 각고의 노력. 자신이 저지른 짓을, 극도의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와중에도 계획적으로 은폐해나가는 과정이 스릴 넘친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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