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의 빛을 따라 암실문고
나탈리 레제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 읽은 동화부터 자라서 본 영화와 소설까지 많은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죽었습니다. 때로 뻔한 스토리라인을 차용하는 컨텐츠에서는 누가 죽게 될 지 빤히 보이기도 하고, 특정 유형의 행동은 '사망 플래그'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하고요. 아 쟤는 죽겠네, 역시 죽었네, 하고 심드렁하게 인물들의 죽음을 넘겨 버리고 곧 잊은 적도 수십 번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야기 밖에서 죽음을 보았을 때, 특히 그 죽음을 맞은 이가 저와 가까운 이였을 때, 그 죽음이 불러일으킨 감정은 그 어떤 이야기 속 주인공의 죽음보다도 강렬했습니다. 그리워, 보고 싶어, 괴로워, 같은 닳고닳은 가느다란 말들로는 감쌀 수 없는 거대한 감정에 오래간 짓눌려 있었어요. 죽음이 슬펐고, 그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갖지 못해 또 슬펐습니다. 남편을 잃은 나탈리 레제도 이렇게 씁니다:
"...누군가 이미 했던 몸짓을 하고 있는 내가, 무대 위 비탄의 장면을 모방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고, 통곡의 계보 속에서 닳고 닳은 몸짓을 한 번 더 반복할 뿐인 내가 부끄러웠고, 감정도 말도 새롭게 발명해 내지 못하는 내가, 너를 구할 단 한마디 말도 발명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죽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직접 헤쳐나갈 수 있는 미래란 없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멈추고,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요. 하지만 저는 왜인지 죽은 이와 저 사이에 시간적 단절은 없다고, 그냥 제가 볼 수 없는 어떤 먼 곳에 머무를 뿐이라는 이상한 믿음을 키워오게 되었고, 이런 생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님을 종종 알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시간이 영영 끝났음을 견딜 수 없다는 마음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도 생겨난 것이겠지요? 레제도 그녀를 떠나간 남편이 단지 다른 공간에(그렇지만 불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지 다른' 이상이기도 한) 있을 뿐이라고 이렇게 씁니다:
"네가 머무는 공간은 닿을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이제 너는 없다." ... "나와 떨어져 멀리 낯선 곳에라도 '있는' 편이 낫다고. 살아만 있다면, 아아,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알아요, 내 마음 속에 지어둔, 그들이 머무르는 어떤 공간은 그저 나만의 바람일 뿐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절절히 알고 있습니다. 애도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소망과 반복되는 부정의 과정인 것 같아요. 레제 역시 다른 '공간'으로 떠나간 남편을 말할 때 그와 남편 사이에 칼같이 시간의 선을 긋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너를 말할 때 세심하게도 과거형을 쓴다. 모든 걸 헝클어트려선 안 되니까. 나는 너를 배신한다. 모든 걸 헝클어트려선 안 되니까. 내게는 네가 여전히 현전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네가 부재한다는 신호를 보내야만 한다."
사실 이 책을 읽는 건 살을 에는 겨울바람에 맨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면서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끌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되더라구요. 상실의 고통에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위로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진짜 치유는 고통을 수반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창공의 빛을 따라'를 추천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