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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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때로는 산투르 연주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끔은 한 여자를 취하고 싶다는 열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어떤 때에는 육체노동에 온 몸과 마음을 쏟아붓기도 한다.

소설 전체에서 인상적인 것은 여자를 향한 그의 끊임없는 집착과 노력이다. 그는 여자가 없을 때에는 계속해서 여자 이야기를 꺼내고, 여자가 있을 때에는 그녀를 성녀 혹은 창녀로 인식하며 부단한 구애활동을 벌인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기 자신과 상대 여자를 고전적 역할놀이에 끼워 맞추지 않고서는 여자를 대할 수 없는 빈약한 서사적 자아를 지닌 이의 우스운 이야기이다.

"하느님, 회사의 이득과 과부라는 명목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p.176)". 조르바는 평생 여자를 만나 즐기는 것이 곧 자유라고 애써 명명하지만, 성욕이 반드시 특정 성별의 대상화와 비하를 수반하여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편견에 굳어 버린 마음을 안고 자유로 향하는 길을 찾기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알 길 없는 조르바는 늘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힌다 : "내 천국은 바로 이걸세. 벽에 알록달록한 드레스가 걸려 있고, 비누 냄새와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가 있으며, 옆에는 인간의 암컷이 누워 있는 향긋한 방!"(p.217) 나아가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조르바의 열띤 설명은, 구조적으로 권력을 지닐 수 없어 어항 속 물고기처럼 갇힌 채 서로를 물어뜯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을 두고 '여자들이란 질투가 많다'고 평하는 영화 홍등(장예모 감독)의 남주인공을 떠오르게 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조르바의 생각이 같은 종족의 남자들에게 강한 전염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나'는 조르바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지난 삶이 '지루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우유부단한 데다 그저 꿈같기만 했'(p.175)다고 회고한다. 나아가 조르바를 "진정한 남자의 모습(p.357)"으로 추켜세운다.

'나'는 조르바의 행적을 "논리, 도덕, 정직-을 간단히 깨부수고 본질로 곧장 직행"한다고 평하지만, 그들이 굳게 믿어 마지않는 그 본질이라는 것 역시도 켜켜이 쌓인 먼지 같은 오래된 편견이자 얄팍한 허세라면, 그들이 말하는 쾌락의 추구가 자유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즐거움을 좇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낡은 합의들, 예를 들면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며, 반드시 이성 간에만 이루어져야 하고, 결혼을 했다면 아이를 낳는 것이 옳다거나, 성생활은 '점잖게' 속박되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 저항하려고 한 조르바는 정작 자신이 보지 못한 다른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 허상뿐인 자유를 좇았다는 점이다. 문란한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이 엿보인다고 할까. 그래서 내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웃픈 희비극이었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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