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 - 터키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의 서울 산책
아리프 아쉬츠 지음 / 이마고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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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과 터키의 수교 50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사진전 '이스탄불'을 위해 한국에 온 터키의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 그가 좋은 '꽃구경'을 마다하고 카메라 하나를 메고 서울의 뒷골목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찍은, 간만에 만나는 제대로인 스트리트 스냅사진과 순간의 그의 단상들이 그리 빡빡하지 않게 담겨져있는 책이다. 남산타워, 한강유람선, 63빌딩과 같은 이른바 서울관광 3종세트는 물론, 각종 고궁과 미술관, 박물관도 그의 시야를 잡지는 못했으며, 에버랜드, 롯데월드, 민속촌 등의 각종 테마를 가진 볼거리들도 그는 심드렁. 거처했던 신림동이니 양재동 근처 혹은 사진전 때문에 오고갔던 홍대와 영등포구청 일대가 대부분 그의 사진의 배경으로,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서울 사람들의 일상이 참으로 충성스런 피사체가 되고 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순간부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며칠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다보니 깨달았다고 한다. 서울 사람들은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카메라를 들이대면 획, 고개를 돌리는 통에, 어쩔수없이 찍게된 그들의 뒷모습이며 다리, 어깨, 등은 그래서 언제부턴가 본격적인 포커스를 차지하게 되고, 더불어 그들, 서울 사람들이 입고 있는 원색적이고 화려하기 짝이없는 옷들은 아리프의 눈을 사로잡는 통에, 꽃을 팔고 있는 아줌마의 꽃가라 티셔츠, 횡단보도에 서있는 학생의 블랙앤화이트의 스트라이프 니트, 대나무를 파는 아저씨의 옷에 그려진 대나무 그림들은 불현듯 그의 사진 속에서 카멜레온의 등장을 떠올리게끔도 한다.

광우병 파동 시기, 서울의 촛불집회 장면을 지켜보며, 한창 커야할 젊은이들은 고기를 먹지말자 하고, 콜레스테롤 때문에 이제 고기는 그만 먹어야할 노인들은 고기를 먹자하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에 골똘했던 이야기, 퇴역군인들이 허리에 총까지 차고 시청광장에 나서자, 아, 이나라 사람들을 군대까지 동원해서 수입고기를 먹지 않을려는 작정이구나, 했던, 나중에야 비로소 그들이 보수우익단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게된 사연 등, 물론 충분히 당시 한국의 사회정세에 대해 파고들고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림동이며 홍대 앞 담벼락의 장미꽃을 꺾어훔치고 다닌 '장미도둑' 답게, 그런 나름 민감한 부분에 대해선 일정정도 선을 그어놓고 서술하고 있다.

일년 반동안 낙타 열마리를 끌고 걸어서다녔던 실크로드보다, 더 힘들었던 서울거리, 갈만하면 지하도이고, 쉴만한 벤치도 어째 잘 안보이고, 서울 역 앞 대우빌딩에서 바닥을 치게되는 도시미관을 애써 '돌려돌려' 지적하는 것을 읽는데, 이젠 그다지 부끄럽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나를 깨닫는다. 한국 어때요,,한국인상 어때요,, 라고 묻기 바쁜, 그러니까 작가 말대로 '저 어때요..'가 가장 궁금한 서울 사람들이 어찌 이런 도시경관을 묵묵히 보고만 있는 것일까, 에 대한 것은 나도 분명히 한번쯤 생각해봐야할 일.. 이라는 생각이 숙연하게 든다. 한국에 다녀온 후, 라면 하나 끓여서 컴퓨터 앞에서 유튜브 동영상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는 아리프 아쉬츠, '먹튀' 확률 백프로인 그에게 서슴없이 외상을 내 준 동네 구멍가게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리워 다시 서울에 돌아올 것이 분명한 그가 담아낼 또다른 서울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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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모토키 마사히로 외, 타키타 요지로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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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맞다면, 작년 가을 쯤에 이 영화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니, 제법 상영한지 오래된 영화이다. 이번에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을 받게 되면서, 몇개의 극장에서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기념상영을 하길래, 보러갔었다. 오쿠리비토. 아마도 영화에서 나온 '납관사'를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르나보다. 노우칸시, 라고 말하긴 하더라만, 아마도 우리가 '환경미화원' 이라는 말 대신 '청소부' 라는 말에  익숙한 것처럼, 오쿠리비토, 그렇게 쓰이는게 아닌가 싶다.. 처음 '굿바이' 란 제목을 접했을 때, 그리고 우리나라의 참 황당한 포스터, 를 보았을 땐 무슨 남녀의 '굿바이'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들여다보니, 엄청스런 소재를 다룬 영화였다는 것.. 일본과는 다른 포스터가 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찌보면 그들과 다른 우리의 문화적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 어처구니 없는 포스터는 살짝 양해해주기로 했다.. 

 

나는 아직 살면서 죽은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더더군다나 입관하기 전에 한다는 그 '염'의 과정도 지켜본 적이 한번도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말이다. 생각나는게 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말씀하시길, "할머니 염하고 나니까 너무 곱더라" 하셨던 거. 당시, 죽은 사람을 보고 '곱더라' 하는 말도 참 생경스러워서, 별로 와닿지도 않았고, 엄마말대로 '고운' 할머니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 따위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살면서 한번도 내가 보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이 다 나온다. 시신, 죽은 얼굴, 굳어버린 손과 발,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하고 단장하여 관에 모실 준비를 하는 '염'의 과정.. 까지. 등장하는 시신들의 각각의 스토리, 는 매번의 '염'의 과정과 함께 관객들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듯, 주변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강도를 더해가더라만, 난 조금 찔금, 그렁그렁, 외에는 별다르게 울음이 터져나오지도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나는 많이 두려움에 질려있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안녕, 해야하는 그 순간에 대해서.  

 

깨끗하게 죽어서, 혹은 어찌 죽었든, 깨끗하게 정갈하게 관 속에 들어가는 일이 느닷없이 싫고 무서워졌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 '의식' 같은 염과 납관의 과정을 지켜보다보면, 차라리 치매든 뭐든, 있는대로 '진상'을 떨다 세상 모르는 천치처럼, 흙놀이하다가 잠든 아이처럼 꾀죄죄하게 죽는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가도 좋을만큼, 아니면 부엌으로 달려가서 밥솥을 열고 밥을 퍼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자다 깬 모양, 기지개를 켜며 지금 몇시지, 물어봐도 당연할 것 같은 그런 '멀쩡함' 이상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건,, 너무 서럽다. 그 서러운게 내게 너무 이입이 되었는지, 아니면 이제 내 나이가, 외로움, 쓸쓸함을 지나 '서러움'이 두려운 것을 알게된 나이가 된 것인지, 단순히 '죽는거 싫어'가 아니라, 저렇게 깨끗하게 죽고, 깨끗하게 보내지는게 싫어,, 소리가 자꾸 튀어나오게 만드는 영화였다..

딱, 내가 가진 감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영화, 나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거나, 행여 우울증 증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딱' 그만 죽어야지, 생각에 빠져버릴 영화같다, 나는 모를 먼 미래일꺼라는, 혹은 내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밀쳐둘 수 없는, 보고나니 참 잔인한 소재의 영화를, 그런데 너무 '뻑가게' 아름답게 찍었다. 같은 동양인인 내가 봐도, 영화 전반에 흐르는 미의식에 탄식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을 받는건 정말 당연하지 싶더라는. 아무튼 연일 일본인들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는 중 같다..( 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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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도리스 되리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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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코드 선재, 아마도 아트선재센터, 의 중강당 쯤 되는 곳이었던 이 곳이 극장이 되었다. 주로 상영하는 영화는, 일반 상업극장에 걸리는 영화와는 조금 혹은 많이 다른, 흔히 씨네큐브나 미로 스페이스와 같은 극장에 걸리는 영화와 그 맥을 같이 하는 영화들. 처음 들어갔을 때, 스크린이 많이 작아서 조금 허걱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색다른 매력이 있다. 다른 극장의 경우 맨 앞쪽에 앉게되면 목이 꺾이거나 화면이 눈에 다 못들어오는 불상사가 있어서 피하게 되지만, 씨네코드 선재의 경우는, 오히려 맨 앞에서 세번째 줄쯤에 앉아주면, 마치 집에서 어마어마한 홈씨어터를 즐기고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더군다나 이렇게나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아주 오붓하게 통째로 빌린 기분마져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십몇년 전쯤 보았던 '파니핑크'의 도리스 도리, 감독이 만든 영화. 기억에도 참 독특한 나래이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이번 영화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 기대와 특히, 일본의 하나미, 벚꽃 풍경이 아직 봄기운이 덜 차오른 3월 어느날 쯤, 한번 보고 싶게 만들어버린듯도 하다. 펑펑 울었다는 사람, 가슴이 먹먹했다는 사람, 대체로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축에 끼는 영화, 라는 평이 대세였고, 다른 영화는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떼'로 보는 영화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는, 의외로 관람자 평들이 제법 들어맞는게 이런 영화들이 갖는 속성인지라, 그런 정보마져도 마음에 들어버렸던 영화. 

말기암 남편 루디와 함께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는 트루디, 암을 숨기고 떠나는 여행인지라,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행의 어느날, 정작 남편이 아닌, 부인인 트루디가 돌연사를 해버림으로써 혼자 남게된 남편. 부인이 죽은후, 끔찍할만큼의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부인이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도쿄,를 찾아가고, 부인이 참으로 가고 싶어했던 후지산, 을, 역시 부인이 그렇게나 하고 싶어하던 '부토'춤을 추는 소녀와 함께 찾아가기까지의 이야기, 이방인의 동경에서의 체험이 양념처럼 흥미가 있고, 여기나거기나 똑같구나 싶은, 다 커버린 자녀들의 무심함도 한편 마음을 안타깝게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남자,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은 어디로 가는거지" 라는 대사처럼, 절절하다. 부인이 입던 옷을 입고 동경 곳곳을 헤매며 동경구경을 시켜주는 모습은 어찌보면 참 딱하기도 싶을만큼 처연하지만, 그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여정의 마지막, 부인이 가고 싶어하던 후지산이 보이기를 기다리며 여관에서 맞이하는 아침만큼은, 마치 자기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마지막 하루하루를 가장 아름답게 기다리기로 작정한 양, 조금 경건하기도 하다는.  

죽음의 춤, 이라 불린다는 '부토'춤과 도쿄의 하나미, 그리고 독일인과 일본인이 주고받는 어설픈 영어대사가 묘하게 어울려, 대화와 소통의 의미, 기억과 흔적의 의미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준다. 'roll'을 설명하기가 서로 부족했던 탓에, 깔고 앉은 돗자리를 말아서 '통하게' 되는 순간-dvd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스틸- 의, '비로소 존재가 갖는 완전함' 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이제는 행복할꺼에요, 의 바로 그 행복한 순간, 돌돌 말려서 한 접시에 놓여지는 그 순간, 참으로 사람 살아가는 인생, 둘이 함께 해야 하는 인생이 저렇게 쉽게 와닿도록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게, 부럽다. 장면장면이 참 아름답고 외국인의 시선에서 본 일본인지라, 우리눈에도 참 이쁘고 한편 희안하여 웃음이 나오는 일본의 문화도 간간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탓에, 혹자들은 조금 지루하다 했지만, 나로서는 한장면도 아깝지 않은 영화였던 것 같다.. 특히, 신주쿠, 란 도시는 내 생각엔 참 싸구려에 하급의 티를 벗지 못하는 도시인데, 그 싸구려가 주는 독특함을 지극히 상업화시켜서 '돈을 벌고' 또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무안해하지 않는 그 '천진난만함'.. 일본의 능력은 정말 무궁무진하다..(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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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아네스 자우이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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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는 당신의 우산이 되어줄께요,, 를 겨우겨우 7월의 마지막날 보게되었다. 한동안 엄청스레 쏟아지던 비가 한풀 꺾이고, 이른바 찜통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지, 밤기운도 후덥덥하기 그지없었기에, 시원하게 물이 넘쳐나는 '해운대' 와 같은 영화라든지, 심지어 눈구경을 실컷할 것 같은 '국가대표' 와 같은 영화에 대한 유혹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보고싶어하던 것을 보기로. 늘 씨네큐브 2관만 출입하다가, 처음으로 1관에 들어섰는데, 그 작은 규모에 한번 놀라고, 착석했을 때 좌석규모와는 너무나 황송스럽게 큼지막한 스크린이 주는 푸근함과 깊이에, 살짝 2관이 너무 마음에 들어버렸다는. 상대적으로 큰 규모를 갖고 있는 1관에서는 아무래도 때가 때이니만큼, 관객이 좀 몰릴 것 같은 'up' 이 상영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 작가이면서, 양성평등할당제로 정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아가테 빌라노바', 그리고 성공한 여자들의 이야기, 라는 시리즈의 첫 탄으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려는 다큐멘타리 감독 '미셸'과 '카림'. 이런 류의 영화가 늘 그렇듯 주인공들은 제각각 '사연'을 갖고 있기 마련이며, 이런 류의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의 '류'가 늘 그렇듯 그 사연의 '진부함'따위엔 전혀 미동도 없이, 난 따뜻해질꺼야, 작정을 하고 기꺼이 덤비기 마련인지라, 여지없이 이 영화도 보고난 후,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영화를 본 것처럼, 흐뭇하고 포근하기가 그지 없었더라는. 

이번엔 정말 잘될꺼야, 화려한 복귀를 꿈꾸며 나름 '드림팀'을 꾸리긴 했지만, 촬영 첫날부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하는 미셸과 카림, 집안일을 봐주던 아줌마 미무나, 의 아들, 인 카림, 의 부탁으로, 또 겸사겸사 정계출마를 위해 선전용 다큐멘타리, 를 시트콤처럼 찍고있긴 한데 매사가 마음에 안들고 못마땅한 아가테. 그녀의 고향에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은 또 있다. 잘난 언니 덕분에 소외감과 외로움의 병이 깊은 아가테의 동생 플로랑스, 이 영화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가장 특이한 캐릭터, 를 맡은 그녀의 남편, 스테반- 그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내를 위해 '키에르케고르'를 읽어준다 - 그리고 아랍계 소수민족으로서 남편한테 맞고 살아야했던 카림,의 엄마, 미무나까지, 자의든, 타의든 조금씩 자신의 삶의 궤적이 반듯하지 않게, 다소 흔들리며 비틀비틀 그려지고 있는 순간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카림이 장난삼아 편집한 '폭군 아가테' 버젼의 동영상을 통해 아가테, 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게 되고, 헤어진 연인 앙투완, 을 다시 찾는다. 또, 그동안 투정으로만 생각해왔던 동생의 '삐뚤어질테야'도, 온통 자신의 사진뿐, 동생 사진이라곤 몇장도 안되는, 오래된 엄마의 사진첩을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혼 후 아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셸, 과 자기에게 기대기만 하는 '찌질' 남편이 아닌 강한 남자를 찾고 있던 플로랑스, 는 잠시 정분이 나나, 미셸은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아빠를 찾는 아들에게 달려가고, 플로랑스, 는 자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굶어죽는 일밖엔 하지 않을 남편 곁에 남을 것을 선택한다. 한편,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를 맘에 품게된 일이 어렵고 당혹스러운 카림, 은 '사실은 집에 들어가야해요..' 아쉬움을 떨구면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폭력남편에게 평생을 시달려온 그의 어머니 미무나, 는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를 위한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불어로 하면, 영화 제목이, '비라고 말해줘요' 라던데. 그게 왜 그저 '비'가 되야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등장인물들의 삶 위에 무겁게 내려앉던 먹구름같은 '인생의 꼬임'이 한줄기 소나기 같은, 빗속을 거친 후 비로소 조금씩 날이 개이듯, 풀려나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하다. '타인의 취향'의 감독이었던 아네스 자우이, 가 이번에도 각본,감독, 주연을 도맡았으며, 그녀의 전작을 아직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평범한 듯 하면서도 은근 끌리는 수더분한 매력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 허당 다큐멘타리 작가로 나온 미셸, 역의 배우와는 표현상 '남편'은 아니고 오랜 동반자, 라고 한다. 일종의 고품격 코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가지게된 미스테리, 즉,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점은, 영화 내내 오른손을 주머니에 꽂고 나왔던 카림, 이다. 스토리상 손을 다쳤다던지, 흉한 어떤 사고가 있었다든지라는 언급은 전혀 없는데, 평생 그 주머니에서 손한번 꺼내놓지 않은 사람처럼 시종일관 오른손은 주머니 속에.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프랑스에서 아랍계 소수민족으로 사느라 핍박받고 억압받았던 위축과 억눌림의 다른 설정일까 싶기도 하고, 폭력 아버지에 대한 어떤 과거사, 를 대신 의미하는 건가 싶기도 하더라는.

가끔 내가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야말로 '스포일러'도 넘는, 전체 이야기가 다 흘러나오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영화잡지의 새영화 소개하는 기자도 아니고, 게다가 내가 보는 영화의 대부분은, 결말을 알면 김새버리는,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그런 '흥행영화'도 아닌지라, 그냥 술술, 내가 옮길 수 있는만큼, 옮기고 싶은 것을 그대로 적어내는 듯. 이를테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전에 어떤 영화를 봤는데, 혹시 그 영화 봤니.. 라고 했을 때, 아니 못봤는데, 어떤 영화인데..라는 물음에 대한 나직나직한 대답, 을 해주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할까..이야기를 듣고, 어, 나도 한번 봐야겠네,, 라는, 물론, 진짜 그 영화를 상대가 찾아서 보고 안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닌, 그런 공감만으로도 그냥 편안하고 좋은, 그런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에서 끄적거리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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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도시문화의 근대 일본근대 스펙트럼 1
하쓰다 토오루 지음, 이태문 옮김 / 논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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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정말 읽느라 너무 갖고 다닌 책인 셈이 됬다. 이 책을 산 건 석사시절 때이고, 그땐, 일본에 대한 관심보다는 번역자가 국문과 학부시절, 엉키고 뒹굴면서 지냈던 친한 형인 탓에, 그걸 알게된 과정도 너무 신기한 나머지- 근대건축사 강의를 하시던 김정동 교수가 일본에서 우연히 알게된 가이드인데 Y대 국문과 출신의 박사라고 해서 알아보니 바로 그 시절 내가 "때문이형" 이라고 불렀던 그 형 -  구입을 했었던 탓에 솔직히 건성으로,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 형의 말투, 그 형의 의식세계 등을 대충 더듬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번역자 이력을 보면, 참 이 사람도 평범하게 살지는 않았구나 싶은게, 사실 나도 이런 것이 실릴 기회가 언젠가 주어진다면, 내가 한줄한줄 만들어온 이력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다지 평범한 축에 드는 것은 아닐꺼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외우게 된건, 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에 이르는 일본연표에 대한 상식. 특히 쇼와 몇년, 다이쇼 몇년과 같은 계산법에 대해서 이제는 왠만히 익숙해진 듯도 하다, 물론 금방금방 튀어나올 수준은 아니지만 최소한, 1년부터 헤아려가면서 계산할만큼의 어줍잖음에선 벗어난 듯. 그동안 간간히 일본의 근대문화를 다룬 책들을 접하면서 그냥저냥 뭉개면서 지나가곤 했었는데, 이젠 도저히 그렇게 지나갈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 '지대로' 검색질을 해 습득한 팁이 나름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일본의 백화점의 역사가 무려 메이지 몇년까지 올라가니, 다른 건 몰라도 백화점의 역사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근 백여년 정도 뒤쳐진 셈이라고 봐도 좋을듯 싶다. 읽으면서 가장 놀라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바로 일본의 이 선진성, 이라고 해야하겠다. 내 기억에도 불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나 가졌을법한 백화점 문화에 대한 기억이 일본은 1910년 대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선풍을 끌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쫒아가는 것도, 따라하는 것도 한도가 있고 경계가 있는지라, 도를 넘는 그것이 낳은 모든 병폐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될 뿐일텐데 또 이는 어찌하면 좋을지, 를 마치 망국의 경지에 이른 백성마냥 한탄하면 책장을 넘기게 되더라..

이 책은 권공장의 시대, 오복점의 시대를 거쳐, 지금도 익숙한 미쓰코시, 다이마루, 마쓰야, 이세탄, 한큐 등등의 일본의 백화점의 등장과 발전상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근대의 원형'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가, 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일본이 스펀지처럼 서양의 근대문화를 빨아들이고, 나름의 색깔을 입혀 눈이 핑핑 돌아갈만큼의 일본적 근대화를 이룩하던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우리의 일제강점 치하와 맞물려있음이, 한편 내내 '욱' 스럽기도 했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들이 우리를 '밟고' 이룩한 근대화, 라고 말할 만큼 나는 애국자도 아니고, 물론 그러한 근대화의 바탕이 된 대개의 자본이 침략과 약탈에 의한 것들임에는 분명하겠지만, 그런 식의 사고라면, 현재 일본에서 배워갖고 오려고 발악을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의 뿌리 또한 한뿌리임에 분명하니, 우린 자존심상, 아무것도, 배워와도 가져와도, 안되는 것이 되버린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 이를테면, 가져와서 쓸거면 곱게 쓰지 왜 저럴까, 싶은 영어, 를 비롯한 일본 속의 서구문명, 서구문화가 있다. 그것들을 독특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화양절충' 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인들의 사고와 근성, 에 부러움이 생긴 것 같다. 파리로, 영국으로 그 먼 옛날 파견을 보내고, 배워오게 하고, 베껴오게 하면서 받아온 서구의 백화점 문화가 마치 그것이 '완결' 을 위해서 일본을 찾아온 양, 비로소 정착되어지는 모습을 보면, 무엇을 가져와도 자기색을 제대로 입힐 수 있는 재주  하나만큼은 정말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고, 그 이전에, 무엇을 가져와도 자기색을 제대로 입히고야 말겠다는 그 '자기것' 에 대한 자부심이 세계 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쇼3년 건축된 미쓰코시 백화점의 외관을 설명하는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를 인용한 구절이 있는데, 그 기사인즉슨, 이 건물의 외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수에즈 운하 동쪽으로는 비교할 것이 없는' 과 '수에즈 운하 동쪽 최대의 건축물' 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도대체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 '수에즈 운하' 의 상징성이 무엇이길래,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 아무리 운하, 가 중요한 교통수단, 운송수단인 나라이지만, 세계를 이쪽과 저쪽으로 가르는 관점으로 '수에즈 운하'를 기사에서 자연스럽게 인용할만큼, 당시 수에즈 운하가 세계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그렇게 대단했단 말인가, 싶어서, 뜬금없이 한동안 수에즈 운하 검색놀이에 빠졌더랬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지만 물론 한개두 기억못하는 그것을 새삼스레 말이다.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숨은 즐거움이고, 양분이지 싶다. (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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