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이 멸종된 세계에 생존한 사랑

표백된 뇌리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얼굴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다른 종말보다 더 끔찍한 이유가 뭔 줄 알아? 겪어본 적도 없는데 아냐고 묻는 게 웃기긴 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려 봐.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외계인이 침략하든, 소행성이 충돌하든, 재난이 닥쳐오든,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애틋하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여. 슬프지만 아름답고 극적인 이별을 맞이할 수 있어. 하지만 좀비는 아니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 아르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 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포영화를 두려워하지만 좀비영화만큼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죽은 사람의 원한보다 시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더 비현실적이라고 여긴 탓이다.

그러나 동시에 실현된다면 가장 두려운 귀신은 좀비라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원한 따위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두려웠다. 그것은 생명의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랑을 잊지 않는 좀비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몸을 썩게 하고 사고를 정지시키는 바이러스에 정복당한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 한 켠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천선란표 좀비 아포칼립스 연작소설집이다. 원래 단편으로 발표했던 소설을 수정 및 확장하여 하나의 세계관으로 엮은 글이다. 처음부터 연작으로 기획했으리라 착각할 만큼 각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유기성도 좋다.

이 책에서는 좀비 사태의 가장 끔찍한 악몽, '사랑한다는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이라는 가정이 현실화된다. 그러나 천선란의 좀비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한다. 눈동자가 희게 바래고 몸이 썩어들어가는 상태가 되어서도 생전에 사랑한 사람을 알아보고 공격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남은 쪽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사랑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는 거야, 곰팡이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거....

'인간이 비주류가 되고 동식물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천선란의 소개글처럼, 그는 인간 문명이 멸종되어버린 세상을 펼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에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애정이 행간마다, 자간마다 녹아 있다.

책을 읽으며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를 삶에 붙들어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은 사랑을 되새기며 괴물의 선을 넘지 않고,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떠올리며 또다시 오늘을 견딘다.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지긋지긋하고도 사무치는 생을 끝내 잇게 만들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들겠는가?

'그러니까 너도 너를 죽이지 마.'

우리의 뗏목은 망망대해를 지나 우주로 나가고 있다.

'좀비가 되어서도 아무것도 죽이지 말자. 우리는 그럴 수 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