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점선의 영역
최민우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몸이 가벼워진 듯한 그 기분.
체중이 줄었을 때의 느낌과는 닮은 데가 하나도 없는 야릇한 가벼움.
그건 차라리 무언가가 덜어내어졌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크림을 덜어낸 케이크처럼, 음표를 덜어낸 악보처럼,
글자를 덜어낸 책처럼,
자신과 불가결의 관계를 맺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버린 것 같았다."
속도감 있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이었다.
현실에 판타지적 요소를 살짝만 끼얹어서, 무겁기 그지없는 삶을 조금 더 가볍게, 그림자만큼만 가볍게 그려낸 책이다.
이 책의 첫 시작은 할아버지의 예언이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때때로 예언을 하는데, 당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르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런데 하필 예언이랍시고 하는 말은 전부 좋지 않은 말이어서, 가족들은 혼란에 빠진다. 차라리 할아버지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도 할아버지의 예언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 예언은 다음과 같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어쩐지 마냥 악담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충고나 조언 쪽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도 괜찮을 법한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 여자친구 '서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예고도 없이, 서진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도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봐서는 제목이 왜 '점선의 영역'인지 알 수 없다. 제목의 뜻은 직접 읽으며 확인하도록 하자.
이 책에는 줄거리를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장치가 상당히 많다.
예언자 할아버지, 그림자를 잃어버린 서진이 중심 소재가 되어 줄거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스토리를 이끈다. 예언과 잃어버린 그림자는 그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가던 인생에 점점이 생긴 얼룩처럼, 어쩌다 생긴 말썽일 뿐이다.
서진이 그림자를 잃어버린 날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회사의 2차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그 회사의 부장은 여성 최초로 간부진 자리까지 오른 사람으로, 서진은 꼭 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면접에서 대면한 그 부장은 서진에게 묻는다.
현장이 남초인데 괜찮겠느냐,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그만둘 거냐.
남자 지원자에게는 묻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서진에게 부장은 말한다.
"확실히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네요."
서진은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한 소문이 이 바닥에서 돌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날 서진은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서진은 그림자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림자를 빼앗긴 건 아닐까. 그 부장에게, 그 회사에게, 어쩌면 이 사회에. 전 직장에서부터 이어져 여기까지 쫓아온 그 부조리가, 서진을 붙잡고 그림자를 우악스럽게 찢어낸 것은 아닐까. 그림자를 빼앗긴 이후 사람들이 서진을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결과는 생각해 보면 제법 신빙성 있는 추측일지도 모른다.
서진은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며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무게가 가벼워졌음을 실감한다. 필수불가결한 무언가가 덜어내어진 개운함이었다. 서진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다시 자신을 찾아온 그림자를 제 손으로 쫓아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그림자가 없어진 서진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필수불가결한 무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살아가며 그렇게 붙들고 있던 것은,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렇게 홀가분해지는 무언가에 불과했던 걸까. 결국 딱 그림자 정도의 무게였던 걸까. 그런데 그것이 내 존재를 결정한다니,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그런 것 하나 정도는 붙잡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의 끝이 참으로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여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는 이 소설이, 어쩌면 누군가의 인생에 점선을 이루는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정확히 무엇인진 몰라도 아무튼 잘 움직이기만 하면 그걸로 되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