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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 - [초특가판] 일본 고전영화 할인전
오즈 야스지로 감독, 하야마 마사오 외 출연 / 기타 (DVD) / 2006년 3월
평점 :
1923년 신주(信州), 실공장에서 일하는 홀어머니는 가난을 무릅쓰고 공부잘하는 외아들 료스케를 중학교에 진학시킨다. 십수 년이 흐른 1936년 동경(東京), 어머니는 동경으로 유학해서 이제 자리를 잡은 아들을 찾아간다. 번듯한 데 취직해서 좋은 집에 살고 있을 거라 기대하던 어머니는 아들이 살고 있는 초라한 집과 동네에 놀란다. 작고 허름한 아들 집에는 이미 결혼한 여자가 있고 젖먹이 아기까지 있다. 착실한 인상의 며느리가 환대해주지만 어머니는 착잡하기만 하다. 아들은 야간학교의 선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료스케와 어머니는 근처에 살고 있는 아들의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을 찾아간다. 어머니에게 아들의 중학교 진학을 강력하게 권유했던 선생은 자신도 곧 동경으로 가서 더 공부할 계획이라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람이다. 지금 선생은 동경의 변두리에서 작은 돈까스 가게를 하고 있다. 옛날 일을 회상하는 세 사람... 어머니와 료스케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의식한 듯, 세상일 참 뜻대로 안되더군요, 하고 선생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결혼해서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두고 있는 그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힘에 부치는 듯하다.
아들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어머니가 찾아오셨는데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민망하고 죄스럽다. 동료 교사에게 돈을 좀 꾸어보지만 그 돈으로는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 구경 한번 가기도 힘들다. 착한 아내는 입지 않는 기모노를 처분해 마련한 돈을 내놓으며 아들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좀 다녀오라고 권한다. 그들이 마악 나들이를 가려는데, 동네 이웃 소년이 큰 말(馬) 주위에서 놀다가 뒷발에 채이는 사고를 당한다. 병원에서 료스케는 소년의 가난한 엄마에게 아내가 주었던 돈을 병원비로 쓰라고 건네준다. 다음날 다시 신주로 돌아온 어머니는 이제 더 규모가 커지고 기계화된 공장에서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나이들면서 공장에서 점점 주변부로 밀려난 것이다. 동경 나들이가 즐거웠냐는 동료의 물음에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즐거웠다고, 아들이 아주 출세해서 잘 살고 있더라고 말한다. 걸레질한 양동이의 물을 버리러 공장 마당에 나온 어머니는 잡초가 우거진 양지바른 곳에 쭈그려 앉아 생각에 잠긴다....
오즈 야스지로가 1936년에 만든 첫 유성 영화 <외아들>의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외아들>도 서민의 생활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는 거의 빈곤층에 가까운 한 가정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청운의 꿈을 품고 동경으로 유학을 한 가난한 집의 아들이 결국 야간학교 선생으로 주저앉게 된 현실, 그것을 목격한 어머니는 놀람과 실망으로, 아들은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으로 각기 가슴이 아프다.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은 무능해서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는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료스케/ 어머니는 제가 무슨 일 하리라고 생각하셨어요? 어머니, 실망하고 계시죠?
어머니/ 어째서?
료스케/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거든요.
전 가끔 동경에 안 온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학교 나와서 고작 이런 일 한다는 것이 어머니께도 죄송하구요.
어머니까지 고생시키면서 무리하게 동경으로 유학 올 필요는 없었어요.
어머니/ 왜, 어째서?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니? 넌 이제부터라고 이 엄마는 생각한다.
료스케/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어쩌면 제 인생은 벌써 결정 나 버렸는지도 몰라요.
어머니/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면 안되지.
료스케/ 전 어머니랑 같이 시골에서 살고 싶었어요....
어머니 역시 실망하고 계시죠? 하지만 저도 할 만큼은 했어요.
어머니 고생시키는 것이 저한테는 큰 자극이었어요.
동경에서는 야간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조차 힘겨웠어요.
저도 이대로 야간학교 선생으로만 만족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 막연한 걸요.
어머니/ 그럴까?
료스케/ 네.
어머니/ 넌 아직 젊은데 벌써 포기할 건 없지 않니?
료스케/ 포긴 안했어요. 할 만큼은 했다고요.
사람이 넘쳐나는 동경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어요.
어머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필요 없지 않니?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여자 혼자 힘으로 너를 동경에 유학보낼 때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료스케/ 어머니 보시기에는 제가 한심해보이겠지만
오오쿠보 선생님도 그때는 큰 꿈을 갖고 계셨어요.
그랬던 선생님이 동경에서는 돈까스 장사나 하고 계시잖아요.
그 큰 청운의 뜻이 5전짜리 돈까스나 튀기고 있다니...
어머니, 사람이 넘쳐나는 동경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
어머니/ 그거야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료스케/ 어머니,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는 수 없다고요. 그게 동경이에요.
무엇이 이 젊은 사내를 패배자가 되게 만들었을까? 어머니와 아들이 료오스케 선생을 만나본 후, 들에 나가 멀리 큰 공장이 보이는 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위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의 하나다. 네 개의 큰 굴뚝에서 흰연기를 내뿜고 있는 공장을 어머니와 아들은 말없이 바라본다. 오즈는 처절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살벌한 현대 사회의 도래와, 오랫동안 지속돼 왔던 인간적이고 온정적인 삶이 이제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공장으로 암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삶의 잔인함을 들려주는 오즈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이 나직하다.
가난한 아들이 모처럼 찾아온 어머니를 대접하기 위해 별식으로 국수를 사오는 시퀀스도 가슴에 박혀오는 장면이다. 늦은 밤, 국수장사의 피리 소리를 들은 아들은 밖에 나가 국수장사로부터 국수 세 그릇을 사온다. 영화 속에서 국수장수의 짧게 반복되는 피리 소리는 아주 구슬프고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우리 삶에서도 완전히 사라진 각종 장수들의 소리를 생각하게 한다. 야경꾼의 딱딱이소리, 굴뚝청소부의 징소리, 두부장수의 딸랑 종소리, 아이스께끼 장사 소리...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그 소리들에 관한 추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듯,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렸을 적 내가 흔히 듣던 소리들은 지금의 소리들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그 당시에는 전기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음이었다. 이들 자연음들 중 이제는 영원히 없어진 소리들도 많다. 이들 중 몇 가지만 기억해 볼까 한다.
정오를 알리는 요란한 신호 소리. 매일 정오만 되면 육군 부대에서 대포로 공포탄을 쏘았다. 소방서 경적 소리. 소방관의 나무 딱딱이 소리. 동네 사람들에게 화재 위치를 알려주는 소방관 목소리와 북소리. 두부 장수 나팔 소리. 담뱃대 수선장이의 호각 소리. 엿장수 엿통의 자물쇠 소리. 윈드차임 장수 물건에서 나는 찰랑거리는 소리. 나막신 끈 수선장이의 북소리. 불경 외며 돌아다니는 스님의 종소리. 사탕 장수 북소리. 소방차 종소리. 사자춤을 알리는 큰북 소리. 원숭이 곡예사 북소리. 절 의식을 알리는 북소리. 대합 장수. 고추 장수. 금붕어 장수. 빨랫줄 장대 장수. 묘목 장수. 한밤의 국수 장수. 생선 장수. 정어리 장수. 삶은 콩 장수. 곤충 장수. 윙윙 연줄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탁탁 제기 차는 소리. 공튀기기 하며 부르는 노래. 아이들 노랫소리."
이렇게 각종 장수들이 다양했으니 그들이 내는 소리도 그만큼 다채로웠을 것이다. 자동차 소리가 쓸어가 버린 이 잃어버린 소리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국수를 사온 아들은 국물을 마시며 맛이 괜찮지요? 하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가 둘러 앉아 국수 그릇을 들고 훌훌 국수를 먹는 모습은 정겹고도 슬프다. 예의바르고 반듯한 아들과 착한 며느리, 그리고 아들이 사는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태도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비록 가난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품위, 그것이며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더욱 짙은 비애감을 자아낸다. 후기 오즈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어딘지 비현실적인 인물이나 분위기와도 많이 다르다. 어쩌면 오즈는 <외아들>에서 그가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이미 다 얘기했다는 느낌이다.
오즈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편안함의 한 이유가 고정된 장면들과 '다다미 숏'이라 불리는 낮은 카메라 시선에서 비롯되는 건 확실하다. 영화 속의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의 관중은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는 장면들로 구성된 오즈의 영화가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눈이 폭력적인 것에 익숙해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의 눈은 카메라처럼 그렇게 빨리, 높이, 또는 가까이에서 대상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를 보면서 편안해지는 것은 알게 모르게 익숙해 있던 폭력적인 시선으로부터의 해방감과 내 본래의 시선으로 회귀했다는 무의식적인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이다 (less is more)"를 늘 주장했다는 오즈 야스지로는 확실히 영화에서 일본적 미학의 정점을 이룬 것 같다. 또한 '사물의 정취'라 부르는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적인 분위기를 오즈 영화에서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건, 결혼하고 부모를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과정이건, 극적인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오즈 영화를 보고 난 후 밀려오는 느낌은 아무래도 (일본적인) 비애의 감정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비록 오즈가 다루는 주제들이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라 해도 '일본적인 것'에 대해 그리 편안할 수만은 없는 우리에게 오즈의 영화는 그 매력과 호소력으로 간단치 않은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가 단조롭다고 보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의 눈이 단조로운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느리고 완만한 이야기 템포, 극적인 사건의 부재, 사회비판적 시각의 희미함 등 결여라는 말로 오즈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의 눈이 단조롭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결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여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과잉된 무엇 때문이라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과연 그의 말대로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영화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영화 그 자체의 불가능성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오즈는 현대적이며 혁신적이라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매료되지 않기란 어렵다. 오즈 만큼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영화미학을 만들어낸 영화 작가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두부가게 주인에게 돈까스를 만들라는 주문은 무리다. 나는 두부가게 주인이므로 두부밖에 만들지 않는다"고 오즈는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외아들>은 오즈 후기의 <동경 이야기>나 <꽁치의 맛> 같은 대표작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함의 아름다움과 완숙함을 이미 보여주고 있으며, 지나치게 양식화된 후기 영화들보다 진솔함을 더욱 많이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