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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의 여인 - [초특가판] 일본 고전영화 할인전
미조구치 겐지 감독 / 오아시스 (OASIS)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시작된 일본고전영화에 대한 관심이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등을 거쳐 미조구치 겐지에 도달한 셈일까. 앞으로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미조구치 겐지보다 더 뛰어난 일본 감독은 없다고 생각되니 말이다. 역동적, 남성적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세계에서 정신없이 놀다 보니, 조용하고 애잔하기 그지없는 오즈 야스지로의 소시민들이 좁다란 골목과 다다미방에서 손짓해 부른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오즈 야스지로 세계속에서 늙은 부모와 자식들, 자매와 연인들은 차를 마시듯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과 더불어 소리없이 사랑하고 갈등하며 살아간다. 성실하고 선량한 그들은 물론 정겹지만 솔직히, 한편으론 몹시 답답하기도 하다.
미조구치 겐지 영화 속의 인물들은 사뭇 다르다. 그들은 대개 빈곤층이거나 서민들이고 기구한 운명의 기생이거나 가난 때문에 몸을 파는 창부들이다. 자기 의지로 삶을 살아간다기보다는 사회와 시대의 격랑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이며 그런 경우 거의 그렇듯이 대부분 지독히도 불행한 여성들이다. <무사시노 부인>은 남편이 대학강사이고 뼈대있는 가문에 재산도 적잖이 있는 친정을 두고 있는 여인이니 그만하면 출신과 형편은 꽤 좋은 편이지만, 전통과 계급 사회의 억눌림 속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그녀 역시 다르지 않다.
무사시노... 일본 도쿄 중부에 있는 도시. 제 2차 대전 후 주거도시로 되었다. 학교가 많다. 산업구조는 3차산업이 중심을 이룬다... 무사시노를 검색해보니 이런 무미건조한 설명이 뜨지만 영화 속에서 무사시노는 주인공 미츠코가 이제는 옛모습을 되찾을 수 없어 안타까와 하는 추억의 공간이며 영혼의 고향이다. <무사시노 부인>이 만들어진 때가 1951년이니 아마 전쟁과 전후에 많이 망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무사시노는 단지 사라진 미츠코의 시골 고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무사시노 부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인공 미츠코는 그녀가 자랐고 살았던 장소에 깊은 애정과 애착을 느끼는 인물인 것이다.
전쟁 중 도쿄 공습을 피해 미츠코 친정에 미츠코 부부가 피난을 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미츠코의 부모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그 존속에 대한 신념이 대단한 사람들이며 미츠코에게 집과 땅에 대한 전 재산을 상속하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3년 후 미츠코의 사촌 츠토무가 전장에서 돌아온다. 츠토무와 미츠코는 어릴 적 무사시노에서 같이 자란 사이지만 미츠코의 남편은 츠토무가 돌아온 것이 조금도 반갑지 않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자기에게 돌아올 미츠코의 재산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츠코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지만 가문을 흠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기쁨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강사인 남편은 자유연애와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는 '모던'한 사람이며 이웃에 사는 미츠코 사촌의 부인 토미코와 실제로 연애를 하는데, 사실 그는 전통과 현대적 가치 사이에서 표류하는 속물이다.
어릴 적 놀던 무사시노의 여러 장소들을 찾아보며 추억을 나누던 츠토무와 미츠코 사이에 어느덧 미묘한 사랑이 싹트지만, 전통적 가치에 매여 있는 미츠코는 츠토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미츠코의 남편이 미츠코의 집과 땅에 관한 문서를 훔쳐 토미코와 달아나면서 파국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절망한 미츠코는 전쟁에 패하고 궁지에 몰렸을 때 자결하라고 나라에서 주었던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녀 주위에 모여든 미츠코의 남편과 토미코, 토미코의 남편은 그 자리에서도 서로 잘못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싸운다. 환멸을 느낀 츠토무는 미츠코가 그에게 남긴 상속권을 받지 않고 떠난다. 그가 도착한 곳은 무사시노. 이제 옛모습은 사라진 무사시노에 주택들만 가득히 들어차 있다...
스토리 자체는 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애정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라는 내용을 넘어서 전후 일본의 혼란스런 시대상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미조구치 겐지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 하는 미츠코나 그녀와 반대 입장에 있는 인물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냉정한 시선은 현실이 이렇다고 말할 뿐이다. 현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겨 내기 위해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미조구치의 카메라와 롱 테이크는 그들이 겪는 수난과 고통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는 것 같지만 묘하게도 더욱 강한 파토스를 불러 일으킨다.
미츠코와 츠토무가 무사시노를 산책하는 시퀀스는 한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비록 빼어난 풍광과 경치는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이 걷고 있는 일본의 시골은 그래도 논과 수풀이 우거졌고 조금은 따분하고 적막한 느낌을 주지만 소박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그런데도 미츠코와 츠토무는 회한에 차서 그곳이 옛날의 그 장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유년기의 무사시노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격변하는 현대를 살았던 미조구치 겐지였기에 빠르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가 탐미주의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모양이지만 사실 미조구치 겐지가 보여주는 장면들을 탐미주의적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어색하다. 아무리 추악하거나 비참한 인간 세상을 보여줄 때에도 그가 구성한 장면들에는 완벽한 시적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건 그가 세상을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미조구치 겐지의 시가 태어난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무언가 시대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 누구도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은 그토록 아름다운데 또한 그토록 비참한 것이다. 환경에 의해 강요된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인물들은 규율과 규범의 나라 일본이기에 더욱 절실하며 그들이 겪는 고통은 바로 미조구치 자신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강렬한 사회비판적인 힘은 사상이 아니라 그의 시에서 나온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나온 독학자였던 미조구치 겐지는 바로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열한 시선과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교육, 또는 교양 따위가 배양할 수 없는 천재의 재능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순전히 DVD 자켓의 포스터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백해야할 것 같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 영화를 알라딘에서 검색할 때 많은 영화 중에 <무사시의 여인>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수심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젊고 수려한 남자의 옆모습과 그 앞에 양산을 들고 서 있는 기모노 차림의 단아한 여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끌었다. 나중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왜 그 두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마음을 끌어당겼는지 알 것 같았는데, 미조구치 겐지의 대표적인 다른 영화들을 다 보고난 지금도 <무사시의 여인> 포스터만큼 마음에 드는 건 없지 싶다.
<무사시노 부인>은 미조구치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주목을 덜 받는 작품에 속하는 것 같다. 1953년 베니스영화제 수상작이었던 <우게츠 이야기>나 <오하루의 일생>, <신헤이케 이야기> 등이 워낙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도공과 혼령과의 사랑을 그린 <우게츠 이야기>도 그렇고, 높은 신분에서 창부로 전락하는 기구한 여인의 일생을 다룬 <오하루의 일생>은 미조구치 겐지의 완벽주의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걸작임에 분명하지만, <무사시노 부인>은 좀 다르게 가슴 깊이 울려오는 맛이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대간, 남녀간의 갈등과 혼란이야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오즈 야스지로가 주로 다룬 주제도 바로 그것이지만, 이 탁월하게 정밀하고 아름다운 일본화는 미조구치 겐지만이 그려낼 수 있었던 리얼리즘의 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