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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자
기독교의 성자들은 육체에 갇힌 영혼, 또는 인간에 갇힌 신 혹은 신성이라 불렸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정진했으므로. 그들은 영혼을 일깨우고 신께 이르기 위해서 가난, 정절, 순종을 지키며 살았으며, 그 노력은 생을 마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성자의 존재는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아래는 13세기에 활동한 성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기쁨에 대해 설교한 내용이다.
기쁨이란 더 이상 자기 집에 있지 않는 것, 언제나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온몸이 쇠약해지고 모든 것에 굶주린 채, 마치 하느님 배 속에 든 것처럼 세상 밖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티안 보뱅, 마음산책, 101쪽)
이것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와 같이 살 수 없다.’
히즈라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히즈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히즈라는 인도에서 남성이면서 여성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히즈라는 기존의 남성/여성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언어 체계(이해 체계이자 정치 체계)의 바깥에 있는 단어이자, ‘신성한 영혼’이 사는 ‘육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히즈라와 기독교의 성자와의 유사점이 드러나는데, 성자가 영혼에 초점을 맞춘다면, 히즈라는 육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들은 몸을 치장하고, 히즈라 특유의 노래, 관능적인 몸짓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히즈라가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맥락에는 기존의 언어 체계와의 충돌이 자리잡혀 있다. 아프타브는 남성과 여성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났는데, 아프타브의 아버지는 이 이질적인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을 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노래할 우두르어 시를 떠올릴 수 없었다. 평소엔 모든 상황에 적합한 시가 떠올랐는데, 그의 시 세계에 없었던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때부터 아프타브의 아버지는 시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세운다. 아이를 향한 따뜻한 말보다 아프타브의 여성 성기를 봉합하는 것, 아프타브에게 남성성을 주입하는 게 최고의 목표가 된다. 아버지의 시의 주제가 될 수 없었던 존재, 아프타브는 결국 거리의 히즈라의 복장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세계를 떠난다. 히즈라들이 거주하는 공동체에서 아프타브는 안줌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인도-파키스탄
로이는 남성에 갇힌 여성, 히즈라의 존재를 통해 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갇혀 경험하는 폭력의 실상을 폭로한다. 남성에 갇힌 여성의 존재가 힌두 인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고통과 교차되고, 겹치면서 사적인 폭력과 구조적-역사적 폭력의 경계가 사라지고, 한편이 한편을 가두는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가 드러난다. 작가가 히즈라를 그 고통의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히즈라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님모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 행복한 사람 없어. 행복이 가능하질 않아. 아레 야르 생각을 해봐.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결국엔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39쪽)
남성과 여성의 언어 체계를 벗어난 인간인 히즈라는 인도-파키스탄 분쟁이라는 다른 체계의 충돌을 몸으로 체화한 존재이다. 잠시 안줌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화약고인 카슈미르 지방에서 이슬람 게릴라와 인도 정부군의 피 흘리는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안줌의 몸에서 일어나는 문제임을 깨닫고 몸을 움찔이게 된다.
묘지
남성과 여성의 체계 속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로이는 새로운 언어 체계, 곧 새로운 이해 체계이자 정치 체계가 나타나야 함을 역설한다. 히즈라로 대표되는 체계의 바깥에 있는 이들만이 그 섬세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이 펼쳐지는 곳은 다름 아닌 묘지로, 이곳에서 아프타브의 아버지가 노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가 들리기 시작한다.
안줌은 어느날, 인도 정부군에게 린치를 당한 충격으로 공동체를 떠난다. 그리고 묘지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꾸린다. 그리고 이곳으로 인도-파키스탄의 폭력에 시달리다 그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모인다. 묘지에 게스트하우스가 설립된 것이다. 틸로와 미스 제빈 2세가 인도-파키스탄의 폭력을 피해 게스트 하우스에 정착하는 것은 작품 후반부의 중심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을 세세히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이곳은 기존 언어 체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일들이 없었으며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쟁은 멈추었고, 모두가 초대되었다.
묘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존재이므로, 묘지에서 인간은 성별, 종교, 인종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살아가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로이는 작품 속에 반복해서 A가 B에 갇힌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묘지에 설립된 게스트 하우스는 죽음에 갇힌 삶을 상징한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 모든 죽은 것들이 다시 살아가기 위해 흘러 들어가는 삶의 공간. 그런데 사랑으로 모든 것을 충만하게 아우르는 "관대한 주인" (49쪽)이 여기에 살고 있다. 안줌이 이름 모를 ‘영어를 아는 남자’에게 “모두가 초대되었어요.” (15쪽) 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이 말이 그녀 삶에 대한 예언이었을 줄 몰랐을 것이다. 이 말을 할 때, 그녀는 묘지에 심긴 상처받은 나무였고, 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놓았을까요?” (17쪽) 이 기도를 들은 자비로운 성자는 그녀를 통해 모두가 초대될 공간을 예비해두었다. 그곳은 묘지였고 또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지복의 성자여
로이의 작품이 가리키는 지복의 성자는 작품 말미에 알려진다. 바로 ‘하즈라트 사르마드’ - 지복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 (544 쪽). 그 성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아니다. 작품 전반부에 나온다. 그러나 “사르마드의 영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들의 필요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22쪽)) 그러나 성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살펴 보면 어떤 인물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자하나라 베굼은 사르마드의 묘지에 찾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아이 아프타브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아프타브라는 이름을 버리고 히즈라가 된 안줌 역시 사원 앞에 버려진 아이 자이나브를 데려다 키울 때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자이나브가 사담과 결혼한 이후 안줌은 틸로, 미스 제빈 2세를 포함한 식구들을 사르마드에게로 데리고 갔다. 마치 자이나브와 사담이 아이를 낳을 것을 예견하듯이.
위로받지 못한 자들,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성모독자들이 성자 사르마드에게 기도하는 자리엔 항상 어린 아이가 있었다. 성자 사르마드는 아마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니, 진실은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아이, 사원에 버려진 아이,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속에 태어난 아기, 이 아이들이 바로 성자 사르마드라는 것이다. 아이의 보호자들은 성자 사르마드를 데리고가 성자 사르마드에게 기도했으니, 이보다 정확한 기도는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레 기도하게 된다. 특히,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머니의 몸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아기가 경험하는 최초의 해방과 탄생성은 갇혀 지내는 이들에게 있어 기도의 응답이다. 성장하는 아이가 꾸준히 상기시키는 탄생성은 우리의 희망이다. 이것은 희망이므로 절망을 내포하고 있다. 성장하는 아이가 점점 세계의 질서를 몸에 새길 때, 그래서 갇혀 있는 우리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 가는 건 우리의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어디까지나 우리에 대한 절망이다. 이 절망이 아이가 가진 탄생성의 희망을 압도할 수는 없다. 로이는 안줌, 자이나브, 미스 제빈 2세로 이어지는 기도를 통해 희망이 절망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그 기도로 인해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들의 세계, 힌두 인도에 갇힌 이슬람의 세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 "모두가 초대되었어요."
13세기 십자군의 세계에 살았던 프란체스코도 폭력적 정신에 맞서 사랑을 노래하며 묘지로 흘러들어갔다. 이것이 기쁨인가. 나도 거기에 갈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여, 묘지에서 살게 될 아이들을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