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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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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소설·수필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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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기다리며
시몬 베유 지음, 이세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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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느낌의 시간 /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
페터 한트케 지음, 김원익 옮김 / 이상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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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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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자

기독교의 성자들은 육체에 갇힌 영혼, 또는 인간에 갇힌 신 혹은 신성이라 불렸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정진했으므로. 그들은 영혼을 일깨우고 신께 이르기 위해서 가난, 정절, 순종을 지키며 살았으며, 그 노력은 생을 마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성자의 존재는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아래는 13세기에 활동한 성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기쁨에 대해 설교한 내용이다.

기쁨이란 더 이상 자기 집에 있지 않는 것, 언제나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온몸이 쇠약해지고 모든 것에 굶주린 채, 마치 하느님 배 속에 든 것처럼 세상 밖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티안 보뱅, 마음산책, 101쪽)

이것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와 같이 살 수 없다.’ 


히즈라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히즈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히즈라는 인도에서 남성이면서 여성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히즈라는 기존의 남성/여성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언어 체계(이해 체계이자 정치 체계)의 바깥에 있는 단어이자, ‘신성한 영혼’이 사는 ‘육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히즈라와 기독교의 성자와의 유사점이 드러나는데, 성자가 영혼에 초점을 맞춘다면, 히즈라는 육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들은 몸을 치장하고, 히즈라 특유의 노래, 관능적인 몸짓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히즈라가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맥락에는 기존의 언어 체계와의 충돌이 자리잡혀 있다. 아프타브는 남성과 여성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났는데, 아프타브의 아버지는 이 이질적인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을 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노래할 우두르어 시를 떠올릴 수 없었다. 평소엔 모든 상황에 적합한 시가 떠올랐는데, 그의 시 세계에 없었던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때부터 아프타브의 아버지는 시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내세운다. 아이를 향한 따뜻한 말보다 아프타브의 여성 성기를 봉합하는 것, 아프타브에게 남성성을 주입하는 게 최고의 목표가 된다. 아버지의 시의 주제가 될 수 없었던 존재, 아프타브는 결국 거리의 히즈라의 복장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세계를 떠난다. 히즈라들이 거주하는 공동체에서 아프타브는 안줌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인도-파키스탄     

로이는 남성에 갇힌 여성, 히즈라의 존재를 통해 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갇혀 경험하는 폭력의 실상을 폭로한다. 남성에 갇힌 여성의 존재가 힌두 인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고통과 교차되고, 겹치면서 사적인 폭력과 구조적-역사적 폭력의 경계가 사라지고, 한편이 한편을 가두는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가 드러난다. 작가가 히즈라를 그 고통의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히즈라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님모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 행복한 사람 없어. 행복이 가능하질 않아. 아레 야르 생각을 해봐.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결국엔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39쪽)

남성과 여성의 언어 체계를 벗어난 인간인 히즈라는 인도-파키스탄 분쟁이라는 다른 체계의 충돌을 몸으로 체화한 존재이다. 잠시 안줌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화약고인 카슈미르 지방에서 이슬람 게릴라와 인도 정부군의 피 흘리는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안줌의 몸에서 일어나는 문제임을 깨닫고 몸을 움찔이게 된다. 


묘지 

남성과 여성의 체계 속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로이는 새로운 언어 체계, 곧 새로운 이해 체계이자 정치 체계가 나타나야 함을 역설한다. 히즈라로 대표되는 체계의 바깥에 있는 이들만이 그 섬세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이 펼쳐지는 곳은 다름 아닌 묘지로, 이곳에서 아프타브의 아버지가 노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가 들리기 시작한다. 

안줌은 어느날, 인도 정부군에게 린치를 당한 충격으로 공동체를 떠난다. 그리고 묘지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꾸린다. 그리고 이곳으로 인도-파키스탄의 폭력에 시달리다 그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모인다. 묘지에 게스트하우스가 설립된 것이다. 틸로와 미스 제빈 2세가 인도-파키스탄의 폭력을 피해 게스트 하우스에 정착하는 것은 작품 후반부의 중심 이야기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을 세세히 기록하기는 쉽지 않다. 이곳은 기존 언어 체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일들이 없었으며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쟁은 멈추었고, 모두가 초대되었다. 

묘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존재이므로, 묘지에서 인간은 성별, 종교, 인종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살아가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로이는 작품 속에 반복해서 A가 B에 갇힌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묘지에 설립된 게스트 하우스는 죽음에 갇힌 삶을 상징한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 모든 죽은 것들이 다시 살아가기 위해 흘러 들어가는 삶의 공간. 그런데 사랑으로 모든 것을 충만하게 아우르는 "관대한 주인" (49쪽)이 여기에 살고 있다. 안줌이 이름 모를 ‘영어를 아는 남자’에게 “모두가 초대되었어요.” (15쪽) 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이 말이 그녀 삶에 대한 예언이었을 줄 몰랐을 것이다. 이 말을 할 때, 그녀는 묘지에 심긴 상처받은 나무였고, 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놓았을까요?” (17쪽) 이 기도를 들은 자비로운 성자는 그녀를 통해 모두가 초대될 공간을 예비해두었다. 그곳은 묘지였고 또한, 게스트 하우스였다.


지복의 성자여

로이의 작품이 가리키는 지복의 성자는 작품 말미에 알려진다. 바로 ‘하즈라트 사르마드’ - 지복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 (544 쪽). 그 성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아니다. 작품 전반부에 나온다. 그러나 “사르마드의 영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들의 필요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22쪽)) 그러나 성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살펴 보면 어떤 인물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자하나라 베굼은 사르마드의 묘지에 찾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아이 아프타브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아프타브라는 이름을 버리고 히즈라가 된 안줌 역시 사원 앞에 버려진 아이 자이나브를 데려다 키울 때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자이나브가 사담과 결혼한 이후 안줌은 틸로, 미스 제빈 2세를 포함한 식구들을 사르마드에게로 데리고 갔다. 마치 자이나브와 사담이 아이를 낳을 것을 예견하듯이.  

위로받지 못한 자들,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성모독자들이 성자 사르마드에게 기도하는 자리엔 항상 어린 아이가 있었다. 성자 사르마드는 아마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니, 진실은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아이, 사원에 버려진 아이,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속에 태어난 아기, 이 아이들이 바로 성자 사르마드라는 것이다. 아이의 보호자들은 성자 사르마드를 데리고가 성자 사르마드에게 기도했으니, 이보다 정확한 기도는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레 기도하게 된다. 특히,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머니의 몸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아기가 경험하는 최초의 해방과 탄생성은 갇혀 지내는 이들에게 있어 기도의 응답이다. 성장하는 아이가 꾸준히 상기시키는 탄생성은 우리의 희망이다. 이것은 희망이므로 절망을 내포하고 있다. 성장하는 아이가 점점 세계의 질서를 몸에 새길 때, 그래서 갇혀 있는 우리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 가는 건 우리의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어디까지나 우리에 대한 절망이다. 이 절망이 아이가 가진 탄생성의 희망을 압도할 수는 없다. 로이는 안줌, 자이나브, 미스 제빈 2세로 이어지는 기도를 통해 희망이 절망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그 기도로 인해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들의 세계, 힌두 인도에 갇힌 이슬람의 세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 "모두가 초대되었어요." 

13세기 십자군의 세계에 살았던 프란체스코도 폭력적 정신에 맞서 사랑을 노래하며 묘지로 흘러들어갔다. 이것이 기쁨인가. 나도 거기에 갈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여, 묘지에서 살게 될 아이들을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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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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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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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학의 세계- 과학기술과 사회를 이해하기
한국과학기술학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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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회적 구성- 지식사회학 논고
피터 버거 외 지음, 하홍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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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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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 되었다.


  바야흐로 2020년, 십여년 전의 초등학생들이 미래 세계의 모습으로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풍경을 그렸었던 그 시기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자동차 바퀴는 땅에 붙어 굴러가고 있고, 20대가 된 그때의 초등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보다 오늘 하루를 염려하며 살고 있다. 어째서인지 과학-기술이 그리는 미래엔 웃음과 환호성이 많았다. 날아다니는 자동차, 우주 여행과 외계인, 그리고 로봇이 가득한 초등학교 미술 시간 처럼. 그러나 우리가 기대와 어긋난 미래를 살아갈 때, 과거의 웃음과 환호성은 무슨 의미였던 것일까? 이러한 어긋남의 현상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는 게 아닐까?

  2020년을 한 해 앞두고 출간된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2019, 허블)은 우리가 그려야 할 미래 세계를 재고하도록 하는 책이다. 과학-기술과 그 전문가들이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발전할지에 대한 가능성을 얘기한다면, 김초엽 작가는 그 가능성의 세계가 도래했을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소설집 제목으로 삼은 표제작처럼 작가는 불가능성을 전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껏 당면해온 문제는 미래에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뻥 뚫려 매끄럽게 지나갈 수 있는 미래를 그릴 때, 그 앞을 막아서는 불가능성의 존재야말로 우리를 사유로 이끄는 원천이다.  


여전히 남아 있을 문제들

  작가가 그려낸 미래에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의 예를 살펴보자.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워프 버블이나 웜홀을 이용한 우주 여행이 가능해진 세계를 무대로 한다. 드디어 인류는 지구 내를 넘어서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행성 간의 거리를 극복했다. 그러나 여기엔 경제적 효용성의 문제로 워프 버블을 이용한 행성간 이동이 중단되면서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된 개별 인간이 나타난다. 인류가 거리를 극복하더라도 한 인간이 견뎌야 할 그리움의 문제가 남는다.  

  수록작 ‘관내분실’에서는 죽은 자의 뇌를 스캔해서 그 기억을 보관하여 가상 현실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마인드 기술이 소개된다. 마인드 기술을 통해 기억과 애도의 양상은 달라졌다. 애도의 장소가 묘지에서 납골당으로, 납골당에서 마인드가 보관된 도서관으로 바뀌듯이. 여기에서 작가는 산후 우울증을 앓았던 엄마와 딸의 관계를 통해 기억과 애도, 삶과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관계의 문제를 드러내 보여준다. 인류가 망각의 문제를 극복하더라도 인간 사이의 관계의 문제가 남는다. 이처럼 작가는 과학-기술에 의해 도래한 새로운 세계를 무대로 삼지만, 과학-기술에 의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세계에서도 사회와 인간이 여전히 겪게될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현재적인 문제

  과학-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건, 그 문제가 현재적임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고있는 작가의 시점에서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의식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리라. 이 점에서 미래 세계를 무대로 삼는 SF는 현재의 문제를 독특하게 부각시킨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인물이 겪고 있는 현재적 문제는 현재를 더 떠올려보게 만든다. 시간 차이의 신비감이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당기고, 독자가 작품 속에서 현재적 문제에 상응하는 인물과 사건을 만날 때, 독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 안나는 우주 개척 시대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술로부터 소외된 인물이다. 경제적 효용성 문제로 워프 버블을 이용한 우주선 이용이 중단되고 웜홀을 이용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하자, 기존 우주 비행 기술로만 접근할 수 있던 행성계(슬렌포니아)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먼 거리’ 행성계가 된다. 이로 인해 슬렌포니아에 먼저 가족을 보내고, 행성 간 이민을 기다리고 있었던 노인 안나는 홀로 지구에 남겨진다. 그리고 안나에겐 무거운 기다림의 몫이 주어진다. 

"(중략)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181 쪽)

  이 작품에서 노인 안나는 현재적 인물이다. 그녀를 보고 분단 현실 속 남북한의 이산 가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내에서 북한과 남한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거리상 훨씬 가깝지만, 20세기 중반 정치적 급변화로 인해 가장 '먼 나라'가 되었다. 기술적 급변과 경제적 효용성에 의해 이동할 수 없고 남겨진 존재가 안나라면, 정치적 급변과 지정학적 효용성에 의해 이동할 수 없고 남겨진 존재는 이산 가족이다. 안나와 이산 가족은 이러한 거리상의 모순을 체화한 존재다. 이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가까운 거리가 갑자기 먼 거리가 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미래 세계를 현재와 연결짓는다. 행성 간 이동이 불가능해진 건 현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들의 이동을 막는 것은 누구인가. 기술인가, 정치인가.


구원은 어디로부터

   김초엽 작가는 과학-기술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묘사하지만, 결코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만들어낼 미래 세계에도 여전히 문제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문제가 현재적이라면 과학-기술을 통해 새롭게 도래할 것에서 구원을 찾는 태도를 재고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작가는 오히려 과거로구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무언가에 구원의 희망을 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 심어둔 '이타성'에 말이다.

  인간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극복 불가능한 조건 앞에서 체념할 수도 있겠으나, 김초엽 작가는 이 조건 속에서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있었던 능력인데, 김초엽 작가가 그린 미래의 인물들에게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타인을 그리워하는 능력은 안나로 하여금 낡은 셔틀을 타고 가족이 있는 먼 거리 행성을 향해 떠나도록 만든다. 그리움이 거리를 극복하고야 만다. '관내분실'에서 지민은 상처를 주고 세상을 떠난 엄마 은하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271 쪽)

타인을 이해하려는 능력이 기억이 남기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이 능력을 통해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헤아려보고, 진정 인간이 극복해야 할 것은 극한의 우주 여행을 위한 신체적 제약이 아니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대중들이 갖고 있는 편견임을 깨닫는다. 타인을 그리워하는 능력, 타인을 이해하려는 능력, 타인을 사랑하므로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 우리가 이타성이라고 부르는 능력의 여러 양상이야말로 과학-기술의 혁신에도 남아 있을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더 이상 그런 미래를 상상하지 않도록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생각지 못하게 '공생가설'에서 이타성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오랜 시간 인류의 뇌에 공생하여 이타성을 함양하도록 한 어떤 지적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발견. 이는 영영토록 문제에 시달릴 인류의 구원은 미래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과거로부터 온다는 것을, 구원은 우리가 개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실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헤아려 볼 수 없는 이타성에 근거해 살아왔다. 이건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낯선 행성에서 지구인이 아닌 지적 생명체와 조우한 한 언어학자의 생존 스토리를 다룬 '스펙트럼'에서처럼, 낯선 지적 생명체 루이의 이타심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미래는 과학-기술에 의한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우리가 더 이상 그런 미래를 상상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는 많은 이들의 열망과도 상응하는 듯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알라딘 2019 올해의 책'으로, 그리고 여러 매체에 주목받는 도서로 선정되며 세간에 그 존재를 알린 이 현상은 우리들에게 다른 미래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2020년을 앞두고 새로운 기술혁신에 대한 기대보다는 일상의 염려를 등에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우리가 오랜 시간 간직해왔던 걸 발견하게 해 준다. 이타적인 시선 속에서의 해방감을. 그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보라. 아니, 더 이상 그런 미래를 상상하지 않아도 좋다. 이타성에 의해 가능하고 존속할 미래는 이미 왔다. '2019 올해의 책'이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떤 미래학자, 과학-기술 전문가보다 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잘 담은 '미래의 책'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덧붙이는 말.

  • 서론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기술학자 전치형, 홍성욱 교수가 공동 저술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전치형, 홍성욱 저, 2019, 문학과지성사)의 논지를 참고했다. 역사적, 사회학적 탐구도 유의미하지만, 미래상과 그 한계를 그림같이 보여주는 김초엽 작가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 미래상에 오래 머물고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 수록작 중에 서평의 일관된 흐름에 녹이지 못한 작품은 '감정의 물성'이다. 김초엽 작가도 작가의 말에서 이 주제에 대한 글을 더 쓰고 싶다고 밝혔는데, 나도 그 때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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