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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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 때는 두 가지 소설이 유행했다. 바로 인소와 팬픽. 20대라면 학창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일 것이다. 그런데 난 인소는 몰라도 팬픽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아이돌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랬던 걸 수도 있고 종이책이 더 좋아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하고 얘기하다가 팬픽을 안 읽어봤다고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약간 후회가 되긴 한다. 그때는 정말 전설이라고 부를 만한 아이돌들이 많이 활동하던 터라 명작들이 되게 많았다. 오죽하면 해당 아이돌에 관심이 없더라도 팬픽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을 정도.

그때는 왜 그렇게 팬픽이 인기가 많은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그 이유를 좀 알 것도 같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나의 스타를, 내가 만들어낸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건 그 자체로 특별한 일일 것이다. 딱히 어떤 사랑이라고 선을 긋지는 않더라도 애절하고 애달파서 아름다운 이야기에 내 스타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마음은 물론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이 마음이 잘 담긴 소설이다. 모든 팬들을 위한 헌정 소설이랄까. 아이돌 재로캐럿과 그들의 팬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이 이 소설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빛나는 스타이지만 결국 계약서에 적힌 숫자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연예계의 뒷면과 그들을 바라보는 팬의 마음. 그 마음은 때때로 삐뚤어져 최애가 아닌 다른 멤버를 증오하기도 하고 최애 멤버가 탈퇴했지만 여전히 그룹을 응원하기도 한다.

여러 형태인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이 책의 색도 무지개이다. 색깔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과장되지 않고 압축적이면서도 강렬하다. 짧은 단편 안에 이렇게 짙은 감정이 담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왠지 어디선가 진짜로 존재할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정말로 어디선가 또다른 준희가 다인을 향해 달려갈 것만 같다.

요즘 날씨가 많이 흐리다. 내 감정도 많이 흐렸다. 곧 비가 올 것처럼 짙어졌다가 슬픔을 쏟아내기도 했고 잠시 맑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힘든 일상 속에서 무지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 볼 여유가 없었다. 이 책은 그런 허전한 내 마음속의 무지개가 되어주었다. 쓸쓸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따뜻했던 책이었다. 설령 재로캐럿은 끝났을지라도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속될 거라고 말하는 이 책이 좋았다. 추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 존재할 거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 좋았다.

<라스트 러브>는 이 책의 제목이자 제로캐럿의 데뷔곡이다. 그리고 제로캐러의 첫 콘서트이자 마지막 콘서트이다. 처음이지만 마지막이라 더 강렬한 '라스트 러브'는 각각 다른 곡의 형태로 우리의 마음이 남아 있다. 그리고 라스트 러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있다.

과거형이고 현재형이고 미래형이라 애틋한 사랑, 라스트 러브. 좋은 소설을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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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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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출판사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셰어하우스> 서평단 모집글을 보고 정식 출간에 앞서 가제본을 먼저 받게 되었다. 꽤 두꺼운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은 한 남녀의 동거 아닌 동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돈이 필요한 남자와 집이 필요한 여자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리언이 집에 있을 때는 티피가 없고, 티피가 집에 있을 때는 리언이 없으니 엄밀히 말해 같이 산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거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암튼 서로 마주칠 일도 없으니 서로 선만 잘 지키면 문제 없다고 생각한 두 남녀였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에서 남여주인공의 썸이 안 나온다면 말이 안 된다! 둘은 어느새 쪽지를 주고 받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하는데.

전화보다는 서먹서먹하지만 문자보다는 왠지 친근한 쪽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시작하고 티피가 누명(?)을 쓴 리언의 동생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전보다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서로의 삶으로 스며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연애소설의 명장면은 역시 두 사람의 첫 대면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두 사람의 인연은 티피의 늦잠으로 인해 갑작스레 진전된다. 근데 이게 보통 첫만남도 아니고 거의 알몸 상태로 처음 만났으니 참 로맨스 소설다운 재치 넘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지만 이 장면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건 분명하다. 무엇보다 케이와는 다르게 리언 동생의 무죄를 믿어주는 티피의 모습에 리언이 더 그녀에게 끌렸음은 자명하다.

어떻게 보면 어떤 관계도 아닌 남녀가 동거를 한다는 소재이다보니 충분히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로맨스소설은 이상하게 풋풋하다. 하물며 어린 소년, 소녀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녀의 이야기임에도 말이다. 사실 두 남녀는 거의 쪽지로만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이상하게 흥미진진하다. 신선하고 새로워서 그런가. 짜증나는 밀당도, 자극적인 내용도 없어 편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다. 로맨틱 코미디 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소설이다.

이 책이 정식으로 발간될 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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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툰
버선버섯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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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고 싶은데 빽빽한 글자는 부담스러울 때, 귀여운 그림이 가득한 에세이가 끌린다. 리뷰어스 클럽에서 <이십툰>을 발견하고 신청한 이유도 그래서이다. 왠지 20대의 삶을 잘 담아냈을 거 같은 이 책을 받고 난 역시 내가 선택을 잘했구나 싶었다. 공감가는 이야기도 많았고,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신기한 이야기도 많았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너무 귀여웠는데 왜 저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이렇게 그렸는지는 책 끝에 가면 나온다.

화장. 내가 대학교 들어와서 제일 어려워 하던 부분이었다. 난 원래 꾸미는 거에 관심이 큰 편은 아니지만 이때만 해도 거의 생얼로 다녔을 정도였다. 나는 딱히 화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학생이 되고 보니 화장은 마치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화장품을 사려고 매장을 돌아다녔는데 도대체 아아라인은 뭐고 아이브러쉬는 뭐고, 쉐도우는 무엇이며 팩트는 무엇인지, BB크림과 CC크림은 또 어떻게 다른 건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문외한이었다. 20대 여자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고민을 그림으로 잘 담아냈다.

나도 여기저기 잘 부딪히고 다녀서 이 고충이 이해가 되었달까. 특히 잘 넘어져서 살짝 삐끗해도 인대가 늘어나는 유리몸이다. 귀여운 그림이지만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 아직도 내 머릿속엔 과거의 멍이 남아 있나 보다.

성향 자체가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다보니 난 잔걱정도 되게 많은 편이다. 걱정이 돈이라면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될 정도로...걱정부자인 나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걱정 앞에 붙는 문장이 아닐까 하는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그런데 참 돈은 티끌 모아 티끌이었다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요즘 내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있는지 두려울 때가 많다.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민할 때도 괴롭지만 선택을 해놓고 이 선택이 맞는 건지 생각하는 것 또한 괴롭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애초에 정답도 오답도 없는 문제들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삶을 오답이냐 정답이냐 판단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내 삶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이 내게 도움이 되는지 판단하는 건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나는 새벽에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블로그의 이름도 '가장 기분 좋은 시간, 새벽 2시'이다. 요즘에는 저녁 시간에 주로 쓰곤 하지만 한창 야행성일 때는 가족 모두가 잠든 뒤 소설을 쓰는 걸 좋아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서 글을 쓸 때 더 집중이 잘 됐다. 게다가 날씨까지 선선하면 더 기분이 좋아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썼던 것도 같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보낸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매번 후회했던 거 같다. 내가 방심했던 탓에 일이 안 좋게 흘러가버린 것만 같아서.  '안일했던 마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 같아 더 슬퍼졌다'는 말이 그래서 더 와닿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저자의 태몽 이야기였다. 태몽에서 도깨비를 만난 저자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내 태몽이 어땠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서운 도깨비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외로운 아기 영혼이였던 도깨비. 아기를 데려갈지, 어머니 자신을 데려갈지 묻던 도깨비에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끝내 마음이 약해진 도깨비는 아기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기를 부탁하며 저승사자를 따라간다. 너구리를 연상케했던 캐릭터는 알고 보니 도깨비라는 사실이 이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났다. 왠지 무섭기도 하면서도 한편 짠하기도, 귀엽기도 한 이야기였다.

자리에 앉아서 읽으면 1~2시간 정도 걸리는 간단한 에세이이다. 책은 읽고 싶은데 며칠씩 할애하기 어려운 독자에게, 그중에서도 20대를 지나고 있는 독자에게 딱 알맞춤인 책이다. 만족만족.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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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임희정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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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때가 묻을 정도로 꼭 쥐게 되던 이 책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여태까지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은 많이 봤어도 자식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별로 보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많이 대입해서 보게 됐다. 상황은 조금씩 다루지만 그녀가 느꼈던 마음과 내가 느꼈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 같다. 부모님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은 자식이라면 웬만하면 다 갖고 있을 마음이니까. 사실 이번 서평은 부모님에 관한 것이기에 더욱 뭐라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할 이야기가 없다기 보다는 너무 할 얘기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는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띠지에도 적혀 있는 문구, '나는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사실 난 '막노동'이라는 말을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자식을 힘들게 키우는 모든 부모님의 노력을 직업에 귀천을 두어 함부로 말하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 속에 나오는 그녀의 말처럼 '막노동'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지에 적혀 있는 카피처럼 부모님들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사람들이니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을 나는 아직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이 갓난아이에서 어른이 될 떄가지, 한 여자가 숙녀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노동을 했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무얼 보상받았을까. 아버지에게 노동은 평생을 지독히도 따라다녔던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아빠가 많이 늙었다.

-28쪽

10개월 가까이 일해보니 몇 십년을 일한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빠는 여전히 한 번에 기억에 남지 않는 어려운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수험표를 출력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집에서 빗자루를 쓸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정말 지치지도 않나보다. 대단해보이는 이유는 아마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항상 무언가를 할 때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데 엄마아빠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같다. 나보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자식의 이름으로 살아온 엄마도 몇 십년을 집안 살림을 담당했다. 엄마는 엄마로 너무 오래 살았다. 저자처럼 나도 엄마가 '엄마'라는 이름보다는 본인 이름 세글자로 행복한 일들을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여전히 난 엄마가 해주는 비빔국수를 좋아하고 샌드위치를 좋아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취직을 하게 된다면 엄마의 화장대를 조금씩 채워주고 싶다.

나는 매일 아침 더 이상 놓을 자리도 없는 화장품 가득한 화장대 앞에서 아이크림까지 챙겨 바르며 열심히 얼굴에 화장을 하는데, 텅 비어 있는 엄마 화장대 채워드릴 생각은 미처 못했다.

-206쪽

엄마에게 틴트를 사준 적은 있지만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화장품을 사드릴 생각은 미처 못했던 거 같다. 그래서 이번 책을 읽은 걸 계기로 나도 돈을 벌게 되면 엄마에게 예쁜 화장품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핸드폰의 기능을 아버지에게 설명해주던 저자의 모습처럼 나도 아빠의 물음에 좀 더 친철하게 답변해야겠다고 결심했다.나이가 먹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이제는 내가 궁금한 것보다 엄마아빠가 궁금한 게 더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짜증을 내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종의 소통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나도 겨우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힘들었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우리집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엄마는 집에서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고 아빠는 거의 단 한 번도 성적 가지고 뭐라하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집을 만들어줬으니 이제는 내가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다.

위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 그 자체가 위안이었다.

-247쪽

자주 어떤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엄마한테 한 번 안기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 같다. 아빠는 아빠로도 그리고 인생 선배로도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 부모님이다. 위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이라고 말한 저자의 말처럼 엄마아빠 자체가 내게 위안이다.

이 책은 자식이 되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가식 없고 솔직한 이 책은 어쩔 때는 가슴이 찡해지는 슬픔을 주기도 하고 마음을 환하게 하는 행복함을 주기도 한다. 책에 내 손때가 짙게 새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부모와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부모님과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자하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는 책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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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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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일.

나에게 끔찍한 일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종 나는 꿈에서 학교로 되돌아간다. 나에게 '끔찍한 일'은 바로 학교 그 자체이다.

근데 어느 누군가에게는 훨씬 비극적인 일일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일 경우에.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했을 때 나는 바로 '그 범죄'를 떠올렸다. 1부를 읽으면서 부디 그 범죄는 아니길 바랐다. 1부는 고요하게 지나갔으나 왠지 폭풍전야를 암시하는 것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2부로 접어들어 주인공 '제야'가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내 예감이 들어맞은 것에 대해 탄식했다. 이 소설은 제야의 일기임에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다가 제야가 성폭행을 기억하는 장면에서는 유일하게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들어간다. 시점의 전환만으로 얼마나 제야가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문으로 무참히 망가지던 친구 은비의 운명이 제야의 운명이 되었을 때 제야는 비로소 은비의 고통을 실감한다. '소문 속의 그 여자애'. 아마 제야는 자신의 과거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제니도, 승호도 제야의 곁에 올 수 없었던 이유이다.

과거 사람들 중에서도, 현재 사람들 중에서도 제야에게 유일하게 사과한 사람은 이모 뿐이다. 가해자에게는 지극히 너그럽고 피해자에게는 엄격한 사회. 유독 성범죄일수록 이 부분이 눈에 띄게 부각된다. 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야를 외면하는 경찰들과 남자가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제야의 정신은 처참하게 무너져내린다. 그럼에도 제야는 절망하면서도 이겨낸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그마저도 안 했으면 자신이 또 당하거나 그 다음 상대가 동생 제니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제야의 일기를 따라가며 나도 슬펐다. 여자로서,한 사람의 사람으로서 제야의 고통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내고자 하는 제야의 의지를 볼 때마다 기뻤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제야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날짜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제야의 일기는 그녀만의 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기를 저주했다면 내게 빌었을 것이다. 변명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한다. 아낀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할 것이고, 자기잘못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지내는데, 그런 자기를 유지하는데, 어째서 나는 나를 저주하나.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어째서 나조차 내게 책임을 묻는가. 나를 걱정했던 그와 강간한 그는 한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216쪽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고,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 이토록 잘 정의한 문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기보다 잔인해서, 진실하기보다 천박해서 제야의 인생을 망치려한 당숙. 제야는 그런 당숙마저 행복하다면 자기 자신을 저주할 이유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비로소 혼자여도 괜찮은 상태까지 도달한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혼자 많은 걸 선택하고 경험하고 해결하는 동안 난 확실히 좀 더 괜찮아진 것 같아. 강릉에 있을 때도 이런 기분 느낀 적 있었어. 그때 난 내가 정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지금은 그때와 달라. 그땐 이모가 있었지만 지금 난 혼자니까. 혼자서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거야. 다시 괜찮지 않다고 느낄지도 몰라. 그리고 괜찮은 순간도 다시 올 거야. 그렇게 오고 갈 거야. 끝은 아직 멀었어.

-220쪽

제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제야는 혼자서도 괜찮다고, 끝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나도 같이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옆에 없는 시선이 섞여.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에도 그런 시선이 끼어들어서 감정을 방해해. 나를 협소하게 만들고 내 주관을 죽이고, 나를 늘 관찰당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그건 어떤 시선이냐면, 그런 일을 겪은 너는 행복할 수 없다는 시선. 너에게 잘못이 있다는 시선, 너는 영영 외롭게 혼자일 거라는 시선. 네 불행은 네탓이라는 시선. 그 일이 일어나고 내가 배운 시선들이지. 배우고 흡수해서 내 것으로 만든 시선들. 나에게 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때로는 무참한 방관자야.

-224쪽

우리는 어쩌면 제야처럼 자신에게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무참한 방관자일 것이다. 제야는 더 이상 그런 시선이 아닌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선을 택한다.

제야는 사람들의 말이 듣고 싶었다. 우울과 고통과 불안을 듣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제야는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었다. 때로는 달렸다.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출구에 닿을 것이고, 이제 제야에게는 출구가 중요하지 않았다.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걷는 동안 들여다보는 자기 마음이 중요했다. 언젠가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들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날 수 있도록, 왼쪽 벽에 손을 댈 수 있도록, 그들의 오른손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야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232~233쪽

제야의 시선은 당숙과, 어른들과 다르다. 잔인하기보다 다정하고, 천박하기보다 진실되다. 독자가 당숙에게는 손가락질을 하고 제야에게는 응원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책 제목이 <이제야 언니에게>인 이유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이제야'에게, 이제야 말을 건네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거 아닐까. 일기의 끝이 결국은 극복해내고 있는 제야의 모습이 담겼을 때 나는 안심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소설 속에서 현실이라 믿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책을 덮은 다음 생각한다. 제야가 지금도,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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