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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놀랍도록 그대로인 장소들이 있다. 개발이 더디거나 혹은 그와 반대로 계속 다듬어진 장소일수록 그렇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문구점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오랜만에 가보면 어렸을 때랑 똑같다. 주인아주머니도 그대로이다. 갈 때마다 항상 반가워해주신다. 그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곳은 다른 장소와는 다른, 묘한 감정이 밀려든다. 그곳에 갈 때면 짤랑짤랑 동전을 들고 다니던 내가 이제 그 문방구에 가야 하면 동전은 있는지 현금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카드지갑에 몸을 껴 넣은 천 원짜리가 보이면 안심한다. 그래서 문방구는 나한테 ‘묘한’ 곳이다. 그대로인데 그대로가 아닌 나의 변화를 확인하게 만든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바로 ‘편의점’이다. 몇 년 전 우리집 앞에 생긴 편의점은 내 취준 시기와 취업 후 시기를 함께하고 있지만 그곳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다.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별 생각 없이 나온다. 배치된 제품들도 계속 바뀌고 있을 거고 여러 아르바이트생들이 머물다 갔겠지만 내 눈에 그 편의점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나한테 편의점의 인상은 말 그대로 ‘질서정연’이다.
≪편의점 인간≫의 후루쿠라도 이 ‘질서정연함’에 18년 동안 몸담고 있는 사람이다. 보통 20대들처럼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대학교 때 우연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명이자 익명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24시간 규칙적으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편의점의 모습에 큰 안정감을 느낀다. 편의점만이 그녀를 세상의 ‘톱니바퀴’로 만들어준다. 그녀는 프리터족으로서 편의점과 삶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다. 프리터족은 ‘프리 아르바이터’의 줄임말로 아르바이트를 생계로 삼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세상은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어 놨다. 이 규정은 일종의 단계로 12년 동안 공부한 후에는 취업하고 취업한 후에는 결혼하는, 거의 보편화된 순서를 의미한다. 비록 이 단계가 좀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는 12년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교육 제도에 바쳐야 하고 그 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취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자니 패배자니 코쿤족이니 뭐니 온갖 용어들을 갖다 붙인다. ≪편의점 인간≫ 속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편의점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일하는 후루쿠라지만 바깥에 나가면 바로 편견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왜 결혼을 안 했으며, 왜 아직도 취업을 안 했으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냐며 등등 들을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다 듣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안 좋아 취직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70쪽
비록 내가 많은 세월을 산 건 아니지만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래서 그만큼 타인의 삶에 함부로 관여해서도 안 되고 참견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감히 함부로 “넌 왜 이렇게 안 해?”라고 묻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씩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고 있는데 제대로 신발도 벗지 않고 흙발로 들어갈 수는 없다.
후루쿠라의 삶은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흙발자국으로 넘쳐난다. 동창들을 만날 때마다 후루쿠라는 애써 거짓을 뱉어야 한다.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어색해지고 그녀는 편의점에서 흡수한 다른 알바생의 말투를 빌려 위기를 모면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들이 원하는 친구인 척.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힘들어진다. 후루쿠라는 점점 자신을 조여 오는 참견과 간섭을 피하기 위해 편의점에 새로운 들어온 시라하 씨와 동거하게 된다. 시리하는 직업으로 그를 멀리하는 편견을 증오하면서도 그 자신과 그녀의 상황을 경멸하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결국 편의점에서 나가게 된 그는 돈 문제로 집에서 머물기 어렵게 되면서 후루쿠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후루쿠라는 결혼을 하지 않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할 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무능력한 남편을 건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시라하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옳았을까?
후루쿠라가 더 힘들었던 이유는 오직 직원으로 평등하게 대해주던 편의점 동료들이 그녀의 삶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튀김 얘기가 아닌 온통 시리하에 대한 물음만이 그녀에게 날아온다. 변함없이 그저 그녀를 ‘편의점의 후루쿠라 점원’으로 있게 해주던 장소가 바깥의 사회처럼 똑같이 변해버린 것이다.
손님들만은 변함없이 가게에 오고, ‘점원’으로서의 나를 필요로 해준다. 나와 같은 세포라 여겼던 사람들이 모두 차츰 ‘무리의 수컷과 암컷’이 되어가고 있는 불쾌감 속에서 손님들만은 나를 계속 점원으로 있게 해주었다.
-151쪽
그런가. 야단치는 건 ‘이쪽’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지만 ‘저쪽’에 있는 언니보다는 문제투성이라도 ‘이쪽’에 언니가 있는 편이 여동생은 훨씬 기쁜 것이다. 그쪽이 여동상한테는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157~158쪽
항상 은연중에 ‘어떻게 하면 고쳐질까’라는 눈빛을 보내는 가족의 눈빛과 세상의 매서운 기준에 베이며 살아온 그녀는 결국 편의점을 그만둔다. 결국 시라하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직장 면접을 보러 간다. 그 끝은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만해도 되게 좋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생각 못했다. 그녀의 삶은 내 삶과 많이 달랐지만 그 마음과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삶을 관상용으로 무례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 마음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그 오지랖은 한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아, 나는 이물질이 되었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가게에서 쫓겨난 시라하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은 내 차례일까?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이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98족
‘나는 나, 남은 남’이라며 쿨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여전히 남의 소셜 계정에 악플을 달고포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그도 아니면 친하다는 이유로 특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함부로 그 사람의 삶을 지적하는 손가락들이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지 되돌 보기도 했다. 책 중반에 나온 손님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뭐라 하던 아저씨 손님은 그녀의 미래를 의미하던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선택이 반대였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그녀를 이해했을 거 같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빛의 상자. 그녀는 그 상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인간)이 있고 그녀는 그중에서 그저 ‘편의점’ 인간일 뿐이다.
나는 나, 너는 너. 프레임을 던져버리고 그 사람 그대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우리는 좀 더 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