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왜뭐 - 모든 몸을 위한 존중
경진주 외 지음, 여성환경연대 기획 / 북센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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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에서 봤던 글이네요.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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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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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소 보수적이었던 우리 사회는 ‘성(性)’을 얘기하는 걸 금기시했다. 요즘 들어서야 그게 완화되었다고 해도 불과 40여 년 전에는 가요마저도 검열하던 게 우리 사회였다. 사실 지금도 사회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소설들을 읽어봤을 때 성에 대해 탁 터놓고 얘기하는 소설은 별로 없었다. 아예 인문학 분야로 분류되는 비소설들은 몰라도.
그래서 ≪멀리 갈 수 있는 배≫의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 체감 상으로는 거의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성을 둘러싼 고뇌가 나오는 듯하다. 이 책에는 세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제 곧 미성년의 타이틀을 벗는 리호, 다소 엉뚱한 정신세계의 치카코, 항상 미모를 관리하는 츠바키가 나온다.
세 명다 제각각의 성 관련 고민을 갖고 있다. 먼저 리호의 이야기를 말하자면, 그녀는 ‘성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겪고 있다. 독특한 건 단순히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되기도 많은 난관을 겪은 리호였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지 의문을 느껴 티셔츠 안에 가슴을 압박하는 톱을 입고 머리에는 가발을 쓴다. 그리고 개방되어 있지만 동시에 아늑한 폐쇄성을 갖는 도서관에서 성에 관한 책들을 읽는다. 그곳에서 치카코와 츠바키를 만난다.
치카코는 자신을 별(지구)의 한 조각으로 여기고 건물도 ‘별의 돌기’라고 생각한다. 시간도 사람이 정해놓은 것일 뿐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우주의 흐름이라고 여긴다.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모든 역할도 일종의 소꿉놀이로 생각해 왜 사람들이 ‘땡’이라고 외치지 않는지 의문을 느낀다. 육체관계에 있어서도 별의 일부로서 다른 별과 합쳐지는 과정이라 생각해 인간으로서의 감각은 별로 느끼지 못한다.
츠바키는 ‘여자’라는 과목이 있다면 단연 A+을 받을 인물로, 밤에도 피부를 위해 선크림을 바른다. 리호가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을 꿈꾼다면 반면에 츠바키는 ‘여자’로서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당연히 리호와 많이 부딪힌다.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서로 부딪힘으로써 각자 답을 알아간다. 이렇게 인물 묘사를 세세하게 한 이유는 이들의 특징이 곧 이 소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세 인물, 그중에서도 리호가 답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 가는 과정은 처절할 정도이다. 세상에는 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등)이 있지만 리호는 그 어떤 단어에도 자신을 넣지 못한다. 성을 뛰어넘는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이 쉽게 이루어질리 없는 데다 번번이 츠바키로부터 날카로운 말까지 듣는다. 비서 자격증을 준비하며 항상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츠비키로서는 리호의 그런 노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간에서 이 둘을 바라보는 치카코도 외로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을 인간이 아닌 별의 일부로서, 물체로서 인식해 사람들하고 지낼 때는 일종의 역할극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탓인지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묘하게 외로워보인다. 은연중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는지 자신만 이런 것인지 찾는 듯했다. 리호와 함께 한밤중에 몰래 숨어둔 도서관에서조차 그들은 계속 답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이 세 인물은 답을 찾았을까?
≪멀리 갈 수 있는 배≫에선 그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상투적인 답을 보기보다 답을 얻는 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책의 태도가 만족스러울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세 명이지만 시점은 리호와 치카코의 시점만 나온다. 이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번 정도는 츠바키의 입장이 나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책에서조차 감히 내보낼 수 없는, 겹겹이 갑옷을 두른 그녀의 내면을 상징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츠바키는 리호의 고뇌에 ‘아무도 타지 않는 노아의 방주, 누구도 따라가지 않는 하멜른의 피리’라고 말했다. 이에 리호는 치카코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는 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어요. 무성이라는 건 결국 피난처에 불과했던 거예요…….”
-리호.2 168쪽

책은 이제 덮였다. 리호는 새로운 배를 탔을까? 그 배에 다른 사람은 있을까? 아마 읽는 사람마다 내놓는 답이 다를 것이다.
세 인물은 책이 끝난 이후에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를 떠나 그들이 평온한 항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무튼 우리 모두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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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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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놀랍도록 그대로인 장소들이 있다. 개발이 더디거나 혹은 그와 반대로 계속 다듬어진 장소일수록 그렇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문구점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오랜만에 가보면 어렸을 때랑 똑같다. 주인아주머니도 그대로이다. 갈 때마다 항상 반가워해주신다. 그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곳은 다른 장소와는 다른, 묘한 감정이 밀려든다. 그곳에 갈 때면 짤랑짤랑 동전을 들고 다니던 내가 이제 그 문방구에 가야 하면 동전은 있는지 현금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카드지갑에 몸을 껴 넣은 천 원짜리가 보이면 안심한다. 그래서 문방구는 나한테 ‘묘한’ 곳이다. 그대로인데 그대로가 아닌 나의 변화를 확인하게 만든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바로 ‘편의점’이다. 몇 년 전 우리집 앞에 생긴 편의점은 내 취준 시기와 취업 후 시기를 함께하고 있지만 그곳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다.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별 생각 없이 나온다. 배치된 제품들도 계속 바뀌고 있을 거고 여러 아르바이트생들이 머물다 갔겠지만 내 눈에 그 편의점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나한테 편의점의 인상은 말 그대로 ‘질서정연’이다.

≪편의점 인간≫의 후루쿠라도 이 ‘질서정연함’에 18년 동안 몸담고 있는 사람이다. 보통 20대들처럼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대학교 때 우연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명이자 익명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24시간 규칙적으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편의점의 모습에 큰 안정감을 느낀다. 편의점만이 그녀를 세상의 ‘톱니바퀴’로 만들어준다. 그녀는 프리터족으로서 편의점과 삶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다. 프리터족은 ‘프리 아르바이터’의 줄임말로 아르바이트를 생계로 삼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세상은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어 놨다. 이 규정은 일종의 단계로 12년 동안 공부한 후에는 취업하고 취업한 후에는 결혼하는, 거의 보편화된 순서를 의미한다. 비록 이 단계가 좀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는 12년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의 교육 제도에 바쳐야 하고 그 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취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자니 패배자니 코쿤족이니 뭐니 온갖 용어들을 갖다 붙인다. ≪편의점 인간≫ 속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편의점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일하는 후루쿠라지만 바깥에 나가면 바로 편견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왜 결혼을 안 했으며, 왜 아직도 취업을 안 했으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냐며 등등 들을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다 듣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안 좋아 취직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70쪽



비록 내가 많은 세월을 산 건 아니지만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래서 그만큼 타인의 삶에 함부로 관여해서도 안 되고 참견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감히 함부로 “넌 왜 이렇게 안 해?”라고 묻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씩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고 있는데 제대로 신발도 벗지 않고 흙발로 들어갈 수는 없다.

후루쿠라의 삶은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흙발자국으로 넘쳐난다. 동창들을 만날 때마다 후루쿠라는 애써 거짓을 뱉어야 한다.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어색해지고 그녀는 편의점에서 흡수한 다른 알바생의 말투를 빌려 위기를 모면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들이 원하는 친구인 척.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힘들어진다. 후루쿠라는 점점 자신을 조여 오는 참견과 간섭을 피하기 위해 편의점에 새로운 들어온 시라하 씨와 동거하게 된다. 시리하는 직업으로 그를 멀리하는 편견을 증오하면서도 그 자신과 그녀의 상황을 경멸하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결국 편의점에서 나가게 된 그는 돈 문제로 집에서 머물기 어렵게 되면서 후루쿠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후루쿠라는 결혼을 하지 않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할 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무능력한 남편을 건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시라하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옳았을까?

후루쿠라가 더 힘들었던 이유는 오직 직원으로 평등하게 대해주던 편의점 동료들이 그녀의 삶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튀김 얘기가 아닌 온통 시리하에 대한 물음만이 그녀에게 날아온다. 변함없이 그저 그녀를 ‘편의점의 후루쿠라 점원’으로 있게 해주던 장소가 바깥의 사회처럼 똑같이 변해버린 것이다.



손님들만은 변함없이 가게에 오고, ‘점원’으로서의 나를 필요로 해준다. 나와 같은 세포라 여겼던 사람들이 모두 차츰 ‘무리의 수컷과 암컷’이 되어가고 있는 불쾌감 속에서 손님들만은 나를 계속 점원으로 있게 해주었다.

-151쪽



그런가. 야단치는 건 ‘이쪽’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지만 ‘저쪽’에 있는 언니보다는 문제투성이라도 ‘이쪽’에 언니가 있는 편이 여동생은 훨씬 기쁜 것이다. 그쪽이 여동상한테는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157~158쪽



항상 은연중에 ‘어떻게 하면 고쳐질까’라는 눈빛을 보내는 가족의 눈빛과 세상의 매서운 기준에 베이며 살아온 그녀는 결국 편의점을 그만둔다. 결국 시라하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직장 면접을 보러 간다. 그 끝은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만해도 되게 좋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생각 못했다. 그녀의 삶은 내 삶과 많이 달랐지만 그 마음과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삶을 관상용으로 무례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 마음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그 오지랖은 한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아, 나는 이물질이 되었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가게에서 쫓겨난 시라하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은 내 차례일까?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이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98족



‘나는 나, 남은 남’이라며 쿨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여전히 남의 소셜 계정에 악플을 달고포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그도 아니면 친하다는 이유로 특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함부로 그 사람의 삶을 지적하는 손가락들이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고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지 되돌 보기도 했다. 책 중반에 나온 손님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뭐라 하던 아저씨 손님은 그녀의 미래를 의미하던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선택이 반대였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그녀를 이해했을 거 같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빛의 상자. 그녀는 그 상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인간)이 있고 그녀는 그중에서 그저 ‘편의점’ 인간일 뿐이다.

나는 나, 너는 너. 프레임을 던져버리고 그 사람 그대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우리는 좀 더 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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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
존 벨레어스 지음, 공민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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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했던 어린 시절에는 모든 이야기가 새로웠다. 이야기가 가진 구도와 클리셰는 하나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책을 좋아하게 되고 많이 읽게 되면서 보는 눈은 까다로워졌고 그럴수록 놓치는 작품은 많아졌다. 친구들은 자신이 추천해준 걸 내가 보지 않는다고 종종 섭섭함을 토로했다. 나는 ‘시간이 없다’ 혹은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친구의 추천 작품을 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 기준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걸 느꼈다. 관심이 덜한 작품일수록 그랬다.

판타지 장르를 멀리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무렵이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쩌면 ‘판타지=유치하다’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서리스트에서 사라진 ‘판타지’는 몇 년 동안 내 인생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만나게 된 판타지가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였다.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는 퇴근길에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모험 일지였다. 두께도 두껍지 않고 딱 적당한데다가 오랜만에 읽는 판타지 소설이라 더 기대가 됐다. 줄거리는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읜 루이스가 마법사 삼촌과 살면서 벌어지는 일상으로, 뚱뚱하고 운동을 못한다는 이유로 반 친구들의 외면을 받던 루이스가 유일한 친구를 지키기 위해 마법을 쓰려다 벌어지는 사건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자신의 옆에 있어주던 타비가 떠날까 신기한 마법으로 회유하던 루이스는 타비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결국 위험한 계획을 짠다. 바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

설마는 역시 사람을 잡는다. ‘될까’했는데 됐다. 문제는 되살아난 사람이 ‘마녀’라는 점이고 그 마녀는 삼촌 저택의 원래 주인 ‘아이작 이자드’의 부인이라는 점이다. 세상을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있는 마녀 ‘셀레나 이자드’는 계획을 실행시킬 도구, 저택에 숨겨져 있는 ‘마법 시계’를 노리는데…….

초등학생을 타깃으로 한 것치고는 다소 분위기가 어두웠지만 난 오히려 고딕풍이 물씬 느껴지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저택에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다거나 저택 안에 시계들이 한 번에 울린다거나 창에 새겨진 그림의 모양이 바뀐다거나 할 때 그 특유의 신비로움이 좋았다. 이런 저택을 실제로 탐험해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마저 있다.

다만 시리즈 ‘1편’이라는 느낌이 강해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펼쳐질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이 아직 어려 3분의 2정도까지 힘들어하다 막판에 활약을 펼친 게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편이 있다면 그때는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출판 학원을 다니고 출판사를 다녀서 그런가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띠지가 가로가 아닌 새로로 된 게 신기했다. 이런 것도 다 기획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현실을 지우고 화려한 마법을 보여준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 벽 속에 숨어있던, 강렬한 마법이 안겨준 행복을 오래 기억할 거 같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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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은둔자 - 완벽하게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
마이클 핀클 지음, 손성화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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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만해도 나에게 ‘고독’은 ‘안 좋은 말’이었다. 무조건 ‘단체’만을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나는 ‘개인’이 안 좋은 거라고 배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와 당신을 묶는 사회에서 나는 혼자가 되는 걸 겁내했다. 고독은 씁쓸한 거였고 외로움은 배척해야 되는 건 줄 알았다. 언젠가 내 속에서 내 목소리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에게 고독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스피커에서 큰 음량으로 노래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처음 한 두 시간은 신날지 몰라도 더 시간이 지나면 귀를 틀어막을 지도 모른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정적만이 있는 그런 고독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이제부터 얘기할 책도 ‘고독’을 다루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다. 당장 교보문고만 가도 신간이 쏟아져 나온다. 이 활동이 아니었으면 과연 내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보문고는 이미 많이 가봤지만 갈 때마다 엄청난 책의 수에 정신이 혼미하다.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분명 지났던 곳인데 새로 발견하게 되는 책도 많다. 그렇기에 이 활동을 통해 이 책을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달까.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다. 미국 메사추세츠에 살던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직장‧가족‧일상을 모두 등지고 노스 폰드 인근 숲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27년 동안 문명에서 3분 떨어진 곳에서 생활한다. 평생 이어질 거 같던 은둔 생활은 식료품 창고를 털다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끝난다. 27년의 세월을 혼자서 보냈던 그의 삶은 사회 속에 내던져진다. 그는 꼬리표처럼 들러붙는 사회의 포장에 시달리고 사람과의 소통을 강요당한다. 마이클 핀클은 그의 ‘전기 작가’로서 그의 삶을 이 책에 담았다. 신화보다 더 기이한 진실말이다.

숲속에서 27년을 보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아마 크게 두 가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혼자서 보냈는지, ‘혼자서’ 어떻게 보냈는지. 첫 번째 질문의 답은 ‘도둑질’이다. 은둔자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노스 폰드 오두막과 캠핌장을 도둑질한다. 책에서는 그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것은 장난일 정도로 재미있지도 않았고, 범죄 수준으로 심각하지도 않았다. 장난과 범죄 사이의 어떤 불안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해서 도둑이 들었는데 D사이즈 건전지, 스티븐 킹 소설책이 없어졌다고 말할 텐가? 그러진 않을 것이다.

-장난과 범죄 사이, 42~43쪽


는 값이 엄청 나가는 물건을 남겨두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나 취미로 즐길만한 것만 훔쳐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나이트도 그걸 아는지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생존을 위해서였다고 하나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든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혼자서’ 지냈을까.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작가 마이클 핀클도 ‘고립을 위한 그의 헌신은 절대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고립이 되었을 때 기쁨을 느끼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고립이 되었을 때 미치는 사람이다. 나이트는 왈가왈부할 여지없이 완전히 전자였다. 그는 혹시나 자기가 있는 곳이 들킬까봐 눈이 녹을 때까지 야영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독한 추위에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에도 그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어쩌면 ‘왜 사회를 떠났는지가 아니라, 왜 사회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지가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고 나이트는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내비쳤다. 한 은둔자는 공자에게 “온 세상이 불어난 급류처럼 무모하게 내달리고 있으니 세상에서 완전히 달아나는 자들을 따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189쪽


한 은둔자가 남긴 이 말은 ‘왜 떠났냐’고 묻는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사회에 남는 이들이 더 이상한 사람들로 비추어질 수 있다. 사회를 벗어나 ‘혼자’가 되는 거에 꼭 드라마틱한 서사가 필요한 건 아니다.

그는 세상이 그와 같은 사람들을 수용하게끔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떠났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도, 직장에 다닐 때도,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더 심하게 고통받는 대신 달아났다. 그것은 저항이라기보다 탐색이었다. 그는 인류를 피해 떠난 난민과 같았다. 숲은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다.

-“내가 미쳤나요?” 280쪽


책 어딘가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컴퓨터 화면에 갇혀 지내는 건 이상하게 보지 않으면서 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왜 기이하게 바라보느냐고. 그는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깊고 넓은 사색의 세계로 떠난 것뿐이다. 숲은 그가 제자리에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 지구상의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에게, 남들에게 여러 이미지를 덧씌운다. 자연스레 연관검색어처럼 따라붙는 꼬리표가 생긴다. 그게 좋은 거든 안 좋은 거든. 괜히 인간관계와 관련된 에세이가 나오겠는가.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고독’이 너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가 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하루라도 메신저를 이용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아마 ‘없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소통과 타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또한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혼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하루라도 누구와 연락하지 않으면 허전해했다. 문득 지치는 순간이 와도 견뎌야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고독이 지루하기는커녕 미치도록 그립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왠지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지 않나?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요즘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회에 적용되는 말이고, 어쩌면 개인에게는 ‘비소통’이 필요한 걸지도.

이 책 제목에 ‘완벽하게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라는 부제이자 카피가 붙은 이유는 어쩌면 ‘고립’되는 것만이 진실로 자신을 알고, 자신을 초월해 무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도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레이아웃도 참 독특하다. 텍스트를 왼쪽 정렬로 맞췄다. 그래서 더 여백이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중간 본문 문장을 한 페이지로 해서 삽입한 것도 책의 색을 더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나이트처럼 아예 사회를 벗어나지는 못해도 잠시 쉬고 싶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혼자’가 되는 것이, 완벽하게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고 말하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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