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기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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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갓 접했던 중학교 시절만 해도 이 장르하면 당연히 ‘반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말에서 진짜 범인이 정체를 드러났을 때의 충격이 좋았고 왜 범인이 그랬는지 곱씹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모든 추리소설이 엄청난 반전과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이미 충분히 검증된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소설임에도 반전은커녕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끝난 책도 있었고, 하물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별로였던 소설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새부터인가 추리 소설도 다소 깐깐하게 고르게 되었다.
근데 이런 깐깐함이 더 많은 작가를 만나게 해주었다. 출판사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줄거리를 더욱 냉철하게 읽어보고 작가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책을 보는 능력이 조금씩 좋아진 것이다. 그 결과, 시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추리소설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바로 요즘 추리?미스터리 소설들이 트릭이나 반전보다는 ‘동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주목한다는 점이다. ‘어리석은 자의 기록’도 이런 부류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인터뷰집’이다. 일가족 살인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목격자와 피해자 지인들을 만나는데, 정작 그들의 말을 기록한 이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동네 주민의 증언을 듣는다고 치면 주민의 말만 적혀 있다. 기록한 이가 자기가 한 말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에는 ‘대화’를 상징하는 큰 따옴표가 없다. 읽으면서 이 르포라이터의 정체가 제일 궁금했다.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피해자와, 증인, 피해자의 지인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르포라이터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미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책이 편안하게 읽을 책이 아니라는 걸 알 거다. 흠집하나 없을 거 같은 완벽한 가족의 죽음과 그들과 관련된 이들의 스토리를 읽고 있노라면 아마 몇 번 씩 눈살을 찌푸리게 될지도 모른다. 위선과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이들의 천박함이 불쾌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善)을 얘기하는 책이 있다면 악(惡)을 다루는 책도 있는 법. 이 책은 후자이기 때문이다. 읽노라면 겉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거 같지만 속으로는 썩어있는 ‘작은 사회’가 얼마나 많은지 알 게 된다. 그 악순환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해 볼 수 있게 된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더 중요한 소설이다. 그래서 사건 피해자보다는 피해자들의 주변인물들이 더욱 부각되며 같은 상황에 있었더라도 기억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진실을 추리하는 것도 어렵다. 하물며 추리 위주의 소설이면 트릭을 중심으로 범인을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책은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야 하는 거라 더 알아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의 말에 더 몰입해서 귀 기울일 수 있다. 범인을 추리해내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에 도달했을 때는 참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무고한 가족을 살해한 범인은 손가락질 받아야 마땅하지만 삐뚤어진 동기는 생각보다 그 시작이 복잡했다. 세상의 판결을 받아야할 사람은 범인 한 명 뿐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어쩌면 바로 그 세상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할지도.

이 책의 키워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제목에 나와 있는 ‘어리석음’이다. 작품 해설에 나오는 오야 히로코 서평가의 말대로 악하다면 단죄할 수 있고 그르다면 규탄할 수 있지만 ‘어리석음’은 그저 슬프기만 하다. ‘어리석음은 선악도 아닌, 시비도 아닌, 그냥 어리석은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 책의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선악도 아닌, 시비도 아닌, 그냥 어리석은 것. 진실과 자신에 무지했던 이들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참혹함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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