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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사는 세상과 꼭 닮은 공상과학 세상 '스노볼'

혹한으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는 책의 초장부터 독자를 영하 46도의 세상으로 떠밀어 넣는다. 이 책의 주인공 전초밤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마주하는 건 '파사삭' 코의 점막과 속눈썹이 얼어붙고 몸이 부르르 떨릴만큼 추운 세상이다. 작가의 묘사는 놀랍도록 섬세해서 따듯한 실내에 앉아 책을 읽다가도 금새 흰 눈이 뒤덮인 세상에 홀로 놓여진 것처럼 '오싹' 추위가 느껴지기도 한다.
흰 눈이 지배하는 추운 세상에 유일하게 따듯한 도시가 있다. 거대한 유리돔 안의 아름다운 도시 '스노볼'이다.
스노볼의 온기는 스노볼 밖 사람들의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환산해서 유지한다. 팔과 다리를 이용해 쳇바퀴를 돌려 전기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스노볼에 사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인 셈이다.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임금이 아니다. 바로 '시청료'다. 스노볼안에 사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자신의 생활 모습을 24시간 내내 드라마로 방영해야 하는데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한 시청료가 노동의 댓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스노볼에 사는 사람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인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스노볼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는 '이본 미디어 그룹'의 소수 직계 가족만이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전력을 생산하라'거나 '사생활을 공유하라'는 기본 의무를 지지 않는 이는 이본 그룹 가족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팔아 생존한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노동 덕분에 자본가가 부를 획득함에도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종속 된 듯 행동한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받는 대가는 노동력을 재생산 할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것이다.' 라고. 하루종일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내고도 고작 '스노볼 드라마 시청 권한'만을 지급 받는 스노볼 밖 주민들을 보며 마르크스의 자본론 비판이 떠오른것은 그래서였을 거다. 체계적이고 견고한 거대 권력의 부조리 앞에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노동자다. 공상과학 판타지 소설인 스노볼이 꼭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스노볼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맞닿아 있기에.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이 책에서 가장 악한 이가 '이본 미디어 그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너무 뻔했던 걸까? 이 소설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 책에서 주인공을 내내 조마조마 하게 하고 독자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은 '차설'이다. 차설은 '이본 미디어 그룹'에도 사생활을 공유하는 시민의 의무를 지우게 하겠다는 야심을 가졌고, 그 야심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다면적인 사람이다. 차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인 것인데 그게 독자로서 아쉬웠다. 자본주의의 이면을 종말 이후 세상을 통해 꼬집어줬으면 통쾌하게 그 세상을 전복시키는 장면도 나와줬으면 했는데. 노동자들간의 싸움으로만 소설이 끝 맺어져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스노볼의 후속편을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룬의 아이들의 작가 전민희님이 극찬한 소설이라던데 그 점 정말 공감된다. '박소영'작가님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보았는데 아몬드를 쓰신 손원평 작가님의 뒤를 이을 대형 신인의 등장이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앞으로 쓰실 작품들이 더욱 기대될 만큼 스노볼을 읽는 동안 작가님의 상상력과 문체에 푹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