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묻고 확인했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 의사의 말을 우리가 똑같이 들었는데도 해주는 어딘가 나랑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 P101

그때 내가 제대로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다시 말해보라고, 그 별거 아닌 게 도대체 뭐였느냐고 집요하게 물었다면 달랐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는 있어도 그랬다면 당시 해주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을 거라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대화가 그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 P102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생겼다. 그런 일들은 너무 쉽게 일어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많은 일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상황은 자꾸 나쁘게 돌아가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떤 행동도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었다. 함부로 미안해하기도 어려웠다. 뭘? 내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찾을 수 있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가까웠고 책임질 만한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P108

나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라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래는 공평하게 나눠서 나쁜 일을 상쇄시킬 수 있는 문제인데도 누군가 한쪽만 너무 갖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을 더 가지려고 하고, 웬일인지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뒤따르는 누군가가 줄곧 신호에 걸리고 있다는 말인데,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상황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냥 좋은 일을 좋아하더라, 이 말입니다. - P115

그러난 그럼으로써 우리 부부가 지닌 거의 유일한 미덕(그것은 또한 재앙의 씨앗이기도 했지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이란 모든 문제의 원인임과 동시에 해법이었고, 우리 관계에 있어 시작과 끝이었고, 사실상 모든 것이었고,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녀와 나 둘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의의를 잃는 방식으로 공존하느냐, 우리의 구성 요소를 유지하면서 이 공동체가 회복 불가능한 형태로 부서져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 P140

내가 지금 사는 물건이 헌것이 되는 걸 내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은 얼마나 나이가 들었을 때일까, 그때가 되면 더이상 새 물건을 사지 않고, 내가 가진 헌 물건들이 모두 나만큼 낡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것인가, 그럼 내 낡은 몸이 온통 낡은 물건들에 둘러싸인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들을 했다. - P149

그때 나는 그가, 적어도, 대화를 더 이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내 기분을 알은척해주길 바랐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얘기해보고 싶었고,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삶의 경험이 많은 이로부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의 말을 듣길 기대했다. 아마도 우호적이지만 균형 잡힌, 그런 말을.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 모르는, 그런 게 있을 것 같았다. - P196

한편으로는, 생각해본다. 화자가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전혀 몰랐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따져보면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은 결과를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더이상 생각하기를 멈추는 영역에 속해 있다. 그 ‘어쩔 수 없음’이라는 완강한 벽 앞에서 난 여전히 아득해진다. - P202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술 마시고 섹스만 했다 하면 무조건 홍상수 아류이기까지 한 것이고. 내가 홍상수라고? 여자 한 명 안 나오는 홍상수 영화가 어디 있어. 사지말단을 자르면 김기덕, 장식적이고 예쁜 벽지가 붙은 곳에서 살인하면 박찬욱이라고 하겠지. 그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니들이 홍상수 말고 뭐 본 영화가 있기는 하냐. 성적 소수자가 뭔지나 알기는 하냐. 알 리가 없지. 특별히보 불행하고 이상한 섹스를 하는 애들 같겠지. 평범하고 발랄한 동성애자들은 현실성이 없고 순전히 다 지어낸 것 같겠지. 애초에 보통의 존재로 생각한 적조차 없었겠지. - P287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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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 P36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묻고 확인했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 의사의 말을 우리가 똑같이 들었는데도 해주는 어딘가 나랑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 P101

그런데도 나는 왠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게 다 해주를 위하는 거라고, 그걸 지금 내가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 P102

그때 내가 제대로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다시 말해보라고, 그 별거 아닌 게 도대체 뭐였느냐고 집요하게 물었다면 달랐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는 있어도 그랬다면 당시 해주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을 거라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대화가 그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 P102

무얼 하긴 했는데 그건 해주가 아니라 다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해주가 분명 보았다고 했을 때, 아무도 보지 못한 걸 왜 혼자만 봤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었다. 왜 너만 계속 다르게 듣냐고, 괜한 일에 제발 걱정 좀 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려고 애쓸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화를 내던 해주를 말릴 게 아니라, 뭐가 그렇게 너를 암담하게 만들었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말해보라고, 그게 뭐든 같이 견디자고. 아니면 그냥 옆에서 가만 듣다가, 듣고 싶어할 말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너무 내 말만 해버렸다는 생각에 외로워졌다. 그걸 해주 혼자 견디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 P104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나.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럴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생겼다. 그런 일들은 너무 쉽게 일어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많은 일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상황은 자꾸 나쁘게 돌아가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떤 행동도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었다. 함부로 미안해하기도 어려웠다. 뭘? 내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찾을 수 있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가까웠고 책임질 만한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P108

전체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절대량 같은 게 있어서 그게 늘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닐까. 확률상으로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다만 엄청나게 큰 분모와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분자 값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항상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사고를 당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런데
왜? - P109

나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결국엔 경로를 벗어나버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라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래는 공평하게 나눠서 나쁜 일을 상쇄시킬 수 있는 문제인데도 누군가 한쪽만 너무 갖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을 더 가지려고 하고, 웬일인지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뒤따르는 누군가가 줄곧 신호에 걸리고 있다는 말인데,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상황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냥 좋은 일을 좋아하더라, 이 말입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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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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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당신. 언젠가 그게 내가 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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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더 조심스러워지고 있다. 영화를 보기로 했으면 영화를 보면 되지, 어떻게 가는지가 이렇게나 중요한 문제인가 모르겠다. 데리러 온다고 했을 때 그냥 그러라고 할 순 없었던 걸까. 나는 어딘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나의 태도로 인해 일상의 대화가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을 완전히 자각한 뒤부터 자주 괴로웠다. - P205

기상에서 취침까지 하루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다. 자기는 타자와 마찬가지로 배려하고 돌보아야 하는 하나의 세계인 셈이다. 그리하여 푸코가 말하는 ‘자기에의 배려’를 실천하는 주체는 자신의 내면과 영혼으로 회귀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수행’이라고 표현되는 타자와의 관계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자기의 윤리와 미학을 재구성하는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 P231

하지만 희망이란 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들은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 P237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 P264

더이상 마누라들은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정신, 자아, 때론 몸까지 모두 아웃소싱했다. 우리는 주인 자격을 잃었다. 딸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결국 문의 말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었다. 딸들은 사랑하든 혐오하든 우리를 본다. 볼 수밖에 없다. 자식이자 주식—나는 딸의 백 퍼센트 주주다—으로서의 운명이다. 하지만 나는 후일담이나 꾀죄죄하게 늘어놓으며 추앙받고 싶진 않다. 처절하게 부정되고 가열하게 척결되고 싶다. - P327

민중은 개미다. 우리가 했던 건 뭔가. 개미 행렬의 패턴을 읽고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개떼가 흥분해 왈왈 댔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나는 이를 꽉 물며 손을 비틀어댔다. 네 딸년들은 파브르의 시점을 갖겠지. 내 딸이 식별 불가능한 개미의 얼굴을 하고 흙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복잡한 개미집을 짓고 있는 동안, 물웅덩이 앞에서 한없이 당황하는 동안, 네 자식들은 조감하며 거기가 아닌데, 그렇지 거기지, 하겠지.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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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감정을 휘저어놓는지 알고 싶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감정들이 자꾸만 떠올라 초당 수천 미터는 뻗어가는 것 같았고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그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위해 마련해놓은 대학노트를 일기장 삼아 그의 일상을, 나아가 그를 통해 변화하는 나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 P23

그를 만나는 시간은 새벽의 몇 시간에 불과했으나 나의 하루는 그 짧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완벽히 재편되었다. 그를 만나지 않는 나머지 시간 동안에도 나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엄마의 짜증을 받아내며 병간호할 때에도, 자소서를 쓰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꾸미는 동안에도 나는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만 번은 더 걸었던 거리를 걸을 때에도 나는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의 눈으로 내 일상의 공간을 바라보고 싶어 발 끝을 들고 걸었으며 그의 시선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관심 가질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또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한껏 예민한 상태로 세상의 모든 자극을 받아들였다. - P46

왜 나이든 꼰대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 명쯤 불러대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어젠다를 천 개쯤 대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걸까. 알아서 뭐하게. 알면 뭐가 달라져. 비슷한 것을 알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게. 역시 애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내가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군, 여기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며 몸 같은 것들을 자위질해대려고? - P55

예수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렬히 삶에 투신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어쩌면. 한때 내가 그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 사로잡힘.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에너지도 종교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 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삶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 P74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P88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P89

엄마는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내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저 사람도, 사십오 킬로그램에 쉰아홉 살의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 P91

지금은 기계가 이 모든 일을 해냅니다. 그들은 정교하고 치밀한데다 지치지도 않아요. 이들 덕분에 우린 최고의 공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멋진 신세계 아닌가요? 잠시 후 뱃고동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어딘가에 설치된 영사기가 오른쪽의 넓고 하얀 벽면에 수평선과 배를 비췄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배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마침내 벽 전체를 뒤덮는 그림자가 되는 것이었다. - P138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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