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 P15

그러자 청년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 땡이에요. 그래서 나도 청년에게 말했다. 자네도 땡. 그러니 이제 집에 가요. - P29

베르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비나 쪽을 바라보며,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도 고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고귀하지를, 전혀 고귀하지를 않다고 베르타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 P47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늘어져 흔들리다 바람이 불면 펄럭이고 바람이 잦아들면 가라앉고 그늘이 드리우면 은은하게 시름에 잠긴 듯한 깃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는 불가해한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마치 둘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첫아들의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 P60

베르타는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 전 성당 안뜰에서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빅토르의 병원에 달려가 봉사할 듯이, 앞다투어 소피아의 입양을 주선할 듯이 떠들어댔지만 내일이 되면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그런 허튼소리들을 내뱉은 것일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 P67

한 번 내지르면 다음에는 수월한 법이다. 악을 쓸수록 세상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므로 참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비명이 터지기 직전의 기분을 잘 알았다. 가슴에 긴 끈이 걸린 기분. 조금만 캑캑거리면 끈을 쑥 빼낼 수 있을 듯한 기분. 일단 소리가 터지면 괜찮아졌다. 끈이 빠져나오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면 비명을 지르는 건 신발끈을 묶었다 푸는 일만큼이나 간단해진다. - P91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이미 지나 있었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벤치에 누웠고 느티나무 사이로 수면인 양 찰랑거리는 여름밤을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무늬로 조각났지만 전체이면서 영원으로 가닿는 밤이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구름 속에 숨어 있던 꽉 찬 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그란 달은 이곳과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처럼 보였고, 덕분에 그녀는 이 세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 P138

길도 없는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이제 감당하기가 어려워 올해가 마지막, 올해가 마지막, 하며 몇 년을 버텼는데 더는 할 수 없다. 이순일이 마침내 그것을 인정한 게 올초였다. 이순일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버려진 듯 산속에 남을 묘를 걱정하더니 파묘해 없애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자기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무덤이니까. - P156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의 한국어 때문인 것 같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애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지. - P168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174

키도 다리 길이도 얼굴도 눈빛도, 누가 봐도 열세 살인 승미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자신이 열한 살인 것. 이 년 전부터 계속 열한 살인 것. 언제까지 열한 살일지 알 수 없는 것. - P204

그가 유키코에게서 마음이 정확히 왜, 어떻게 떠났는지는 끝내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눈 오는 풍경처럼 온통 환하고 완벽한, 압도적인 충일함에서 시작하지만 일단 지워지기 시작하면 또 그것이 녹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얼룩이 연쇄되며 진행되니까. 헤어질 무렵 유키코가 했던 오해처럼 유키코의 국적, 출신이 결정적이지는 않았다고 그는 지금도 장담할 수 있었다. 대화하다 일본어도, 영어도, 한국어도 통하지 않을 때면, 그렇게 어떤 한계와 맞닥뜨릴 때면 "그저 티슈 한 장의 차이야"라고 상대에게 말해준 사람은 언제나 그였으니까. 하지만 그 잠깐의 ‘이해할 수 없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키코는 가족 중 하나가 실패한 연애로 오랫동안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상기하곤 했다. 너는 다르다고 상대 가족들이 말했다고 해, 너의 피에는 더러운 것이 있다고. - P245

그가 유키코에게 마음을 고백한 것도 그곳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그 앞에서 만나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있을 때였다. 배가 고팠는지 한창 섭취에 열중하던 유키코가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교내의 숲과 지금 그들의 발 앞에 놓인 땅을 이으며, 날아온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심지 않아도 저 숲에서 자라는 것들이 날아와 여기에 자리잡는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흘에 한 번씩 뒤엎고 갈아가며 필요 이상의 개간 작업을 한 공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언가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날아와서, 행로와 목적도 없이 날아와서 여기에. - P257

그는 돌아갈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지 않은가. 여행사에서 만나 도쿄타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여자가 그의 연락처를 내일이면 유키코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연락이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대로 그의 삶은 어느 방향으로 조금 더 이동할 것이었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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