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평전 - 근대인의 세상을 종식시키고 양자도약의 시대를 연 천재 물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현대물리학을 구성하고 있다. 상대성이론이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면, 양자역학은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에서 그 가치를 발한다. 현대물리학의 큰 과제는 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여 통일된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인데, 아직까지 이 과제를 해결했다는 소식은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막스 플랑크는 ‘플랑크 상수’를 발견한 물리학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양자역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플랑크는 확실한 인과율이 적용되는 물리학에 매력을 느꼈고, 19세기 유행하던 계몽주의에 따라 합리주의자였던 그는 물리학을 통하여 궁극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특히 에너지는 결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어떤 절대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여 그에게 매력적인 주제였다. 결국 에너지에 대한 연구가 양자역학을 여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플랑크는 흑체의 열복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복사 법칙을 발견하고, 이 법칙을 해석하기 위해서 ‘양자도약’을 도입한다. 이 양자도약을 설명하는 것이 유명한 프랑크 상수이다. 프랑크가 도입한 양자도약에 의해 에너지가 미끄럼틀처럼 매끈하게 증감하는 것이 아니라 플랑크상수 단위의 계단을 우둘투둘하게 증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에너지는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최소의 다발, 혹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발전한 학문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플랑크는 스스로 자신을 현대물리학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양자이론이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무용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이 양자이론을 뉴턴식의 고전물리학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이르게 되고, 원자 이하의 세계는 확실한 인과율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 계산에 의해서만 예측할 수 있고, 인간의 관찰 방식에 따라,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식에 따라 관찰 대상이 그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알려졌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끝났다는 것이다. 플랑크에게 확실한 인과율의 종말은 분명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고전물리학의 바탕 하에서 세계에 대한 완결된 이해, 궁극의 해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플랑크는 1858년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하여 거의 90세를 살았다. 플랑크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세기는 이전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물질문명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던 시대였고, 서구의 제국주의는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인류문명에 대한 낙관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특히 유럽의 변방이자 후진국이었던 독일은 프로이센에 의해 제국이 확립되고, 철혈재상이라고 불리는 비스 마르크가 재상에 취임하여 제국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던 시기이다.


 

막스 플랑크의 생애에 독일이 관련된 전쟁이 크게 3번 발발한다. 먼저 1870년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때 플랑크의 형이 전사했다. 그리고 플랑크가 베를린 대학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14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플랑크의 장남이 전사했다. 마지막으로 1939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 전쟁 중에 플랑크의 차남이 히틀러 암살 음모와 관련하여 처형당했다. 이렇게 전쟁과 관련하여 개인사적인 아픔을 갖고 있는 플랑크에게 그 생애가 결코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던 아내는 일찍 병으로 사망하고 쌍둥이 두 딸은 모두 출산 중에 사망했다.

플랑크는 참으로 의지가 굳건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개인사적인 아픔이 그의 학문에의 열정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과학에 대한 헌신을 방해하지 못했다. 양자가설이 물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되면서 플랑크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독일 물리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양자학설 이외에 그의 또 다른 공적은 바로 아인슈타인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무명의 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의 논문의 가치를 가장 일찍 알아본 사람이 바로 플랑크였고,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불러 교수직을 주고 연구를 계속하도록 했던 사람도 바로 플랑크였다.

히틀러가 수상이 된 후에 반유대주의는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정책적으로 확장시켰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플랑크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주었을 것이다. 플랑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독일을 떠난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을 드러내고 칭송하였다는 것은 그가 히틀러와 나치스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는 행위였다.


 

양자역학에서 하나의 비극은 원자폭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자의 핵분열은 플랑크의 여제자인 리제 마이트너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졌다. 마이트너는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고 여기에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인 E=mc²을 대입해서 핵분열을 밝혀냈다. 평화주의자인 플랑크는 일찍이 핵분열 결과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우리 인류는 그것을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을 통하여 실제로 경험해야 했다.


이 책에서 보이는 막스 플랑크는 매사에 신중하고 책임감이 뚜렷하고, 자제력과 의지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근세와 현대가 교차하는 격동의 세월을 감내하며 누구보다도 올바르고 현명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플랑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플랑크의 삶은 카이저 빌헬름 시대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시기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위적이고 민주적인 실험과 결합했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플랑크의 이론은 고전역학의 객관적 확정성을 양자세계의 창조적 불확정성과 연결했다. 수사학적으로는, 플랑크는 일상의 체험세계와 표상세계를 과학의 세계상 안에 있는 개념의 엄밀성과 결합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사실의 인과적 질서에 관한 계몽적 사상을 스스로 선택한 삶의 태도를 위해 자유롭게 결정하는 낭만주의적 관점과 결합했다. 그는 이때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의연하게 감내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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