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지음 / 새싹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맹자(孟子)>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올바로 기르면 천지 사이를 꽉 채울 수 있는데, 그 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도(道)와 의(義)가 항상 수반되어야 하며, 도(道)와 의(義)가 없으면 그 기가 점점 줄어든다고 하였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호연지기를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저절로 발하는 당당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애행(無碍行)이란 행동이 규율에 제약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든 행하지 않을 것이 없고, 무엇이든 먹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의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표현되는 무애행은 불가(佛家)의 계율에 따르면 행하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구애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애행은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속(世俗)에서 부여하는 가치가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조차 초개처럼 여기며, 표리(表裏)가 여일(如一)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당당함’이다. 유가에서는 시종 예의(禮義)를 버리지 않으나, 불가의 무애행은 예의조차도 구애받지 않는다.




무애행으로 이름이 알려진 분은 구한말의 경허 스님인데, 경허의 제자가 만공이고, 춘성이 만공을 스승삼아 수행했으니, 춘성의 무애행은 연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춘성은 13세에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의 상좌승이 되어 받들다가 3.1운동 후 만해가 형무소에 갇히게 되자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때 스승인 만해가 차가운 감옥 마루에서 누워있을 것을 생각해서 자신도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이불도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학승(學僧)으로서 불경을 연구하여 한때는 화엄경(華嚴經)을 거꾸로 암송할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전에도 수행을 위해 물독에 들어가 잠을 쫓기도 하고 한겨울 바위 위에서 몸이 얼도록 좌선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선(禪)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 이후 만공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춘성이 만공을 처음 만났을 때 만공은 춘성이 너무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해서 화두(話頭)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선(禪) 수행의 핵심은 한 조각의 말을 화두로 삼아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많은 지식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춘성은 스스로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는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참선수행을 했는데, 그 후에 만공이 그에게 ‘별전일구(別傳一句)는 재기처(在其處)요’라고 묻는 것을 화두로 삼고 수행하였다. 어느 날 꿈에 만공이 그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으니, 그때 나이 50세였다.

그 후 87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한 점 거리낌이 없는 무애행을 행했다고 한다.




우리 같은 범속(凡俗)한 사람들이 무애행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당시 불가에서도 그랬던 듯 싶다. 춘성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중들이 춘성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보고 비난했으며, 반대로 춘성의 무애행의 본질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겉모양만 흉내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춘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업망(業網)에서 허우적이면서 인연(因緣)의 끈도 끊지 못해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자들이 그저 춘성의 겉모양만 흉내 내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이를 두고 광망(狂妄)하고 허탄(虛誕)하다고 하는 것이다.




육신(肉身)을 갖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오욕칠정(五慾七情)에 노정(露呈)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각고의 노력 후에 오도송(悟道頌)을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수행의 시작임을 알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그만둘 수 없다. 춘성이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단벌의 옷으로 무소유를 실천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머리털만 깎고 가사만 걸쳤지 단 한 번도 용맹한 수행을 해보지 않은 땡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깨달았다고 자인한 후에는 수행을 던져버리고 경허나 춘성의 막행막식을 흉내내는 중들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고려 시대에도 깨달았다고 하면서 그 뒤로 수행은 하지 않고 허탄한 짓만 일삼는 중들이 많이 있었는가 보다. 당시 대각국사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한순간의 깨달음에 빠지지 말고 꾸준히 수행할 것을 주창했다.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무소유와 표리통철(表裏洞徹)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함과 인민(人民)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이 없이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진짜 무애행이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보이는 춘성은 진실로 무애행을 행한 것 같다.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업을 지니고 사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그의 무애행을 본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무(無)자를 화두로 삼아 수행하라는 가르침을 새기고 사는 것은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성내는 것 모두가 소유욕, 집착에서 온다. 이 모든 것의 실상은 연기나 안개처럼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머리로, 가슴으로 알고만 있어도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춘성 자신이 워낙 명리(名利)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신의 법어(法語)를 글로 옮기는 것도 싫어하고, 죽은 후에도 자신을 기리지 말라고 해서, 그 동안 춘성에 대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혹 그의 이름을 안다는 사람도 그의 본 모습을 안다고 하기 보다는 기이한 행동만을 기억하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 책이 나와서 춘성이라는 큰 스님, 큰 스승이 이 땅을 다녀갔으며, 여전히 가르침의 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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