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있으니까 외부의 시선이 존재할 수 없는거다
나는 사람들이 모험을 하게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그중 하나다. 다른 두 가지는 충분한 보상과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 세 가지가 다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과 기업들은 모험을 극히 꺼린다. 그 결과 역동성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 공동체가 계급사회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상속, 혼인, 시험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신분을 바꾸기 어려운.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엘리트를 모아 놓기는 했으나 외국의 같은 직업군에 비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 외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험의 분별력과 공정함을 믿기 때문이다. 그 시험으로 자신들의 능력이 입증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공공기관의 조사가 끝나 법원에서 판결까지 내린 사안에 대해서조차 구직자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수한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고 그들을 꾸짖는다. 가증스러운 기만이다.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이다
나는 정부와 중소기업계가 주도하는 중소기업 인식 개선 캠페인들이 독자를 도서관에 데려가 "좋은 책이 많으니 무조건 읽어라."라고 권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어떤 상품을 사기 전에 그 물건의 품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면 간판은 힘을 잃는다. 간판으로 득을 보던 사람은 그런 정보공개에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원자들과 소비자들은 모두 이익이다. 엄계 전체의 경쟁력도 높아지고, 간판으로 사람의 위아래를 정하는 악습도 사라진다. 중진, 원로라도 실력이 없으면 물러나고, 도전적인 신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
독서는 원래 우회적인 것이고 방황하는 건데, 우리는 거기에서조차 직선적인 정답, 단번의 명쾌한 해답을 요구하죠
성문을 동쪽으로 내느냐 서쪽으로 내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동서 양쪽으로 성문이 있다 해도 충분치 않다. 들어가기 어렵지만 동문으로든 서문으로든 한 번만 안으로 들어가면 귀족이 되고, 거기서 안주한 채 바깥사람들을 깔보게 되는 성이 한국 사회에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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