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사전 비판
이재호 지음 / 궁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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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사전이 일본서 만든 영일사전의 번역 수준에서 못 벗어났다는 건 이 책 말고 다른 데서도 숱하게 꼬집은 사실이죠. 서양 문물을 처음부터 일본에서 수입해 왔으니 이건 그럴 수도 있다 쳐도, 국어사전마저도 일본의 국어사전을 번역한 작업물이 태반이라는 사실은 제가 알기로는 고종석씨 말고는 들고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국어國語라는 말 자체도 일제 한자어죠.]

 

 


사전에 실려 있는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한자어가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데에는, 다른 여러 언어적, 언어외적 상황 말고도, 국어사전 편찬자들이 우리말 한자어의 뜻을 일어사전에 조회하는 관습을 타성적으로 지켜왔다는 부차적 이유가 있다. 일단 차용된 어휘가 새 언어의 어휘장에 흡수되면서 본래 의미의 굴절을 겪는 것은 언어사에서 드문 일이 아닌데, 개화기 이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그런 의미의 굴절을 별로 겪지 않았다. 오히려 동일한 형태와 다른 의미로 한국에 이미 존재하던 한자어들이 본래의 뜻을 잃고, 일본어에서 담긴 의미를 새로 담게 되었다.

지금도 한국어 사전과 일본어 사전에서 표제어로 내세운 한자어들은 거의 일치하고, 그 한자어 표제어들이 부여받은 풀이 역시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것의 일차적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어)이 한국(어)에 끼친 막대한 언어적, 정치적 영향이지만, 한 낱말이 자국어의 의미장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세밀히 추적하기보다는 그 낱말의 원산지에서 나온 사전을 손쉽게 베끼기로 결정한 우리 국어사전 편찬자들의 편의주의도 이 언어적 내선일체를 거들었다. 초창기의 사전은 일본어 사전을 베끼고, 뒤이어 나온 사전들은 초창기의 사전을 베꼈다. [ <감염된 언어> 99쪽]

 

 


Hercules는 헤라클레스의 라틴어 표기이며 영어는 이 표기를 이어받았다. [헤라클레스Herakles는 그리스어 발음이죠.] 라틴어로는 ‘헤르클레스’ 영어 발음은 ‘허클리즈’이다. [영어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건 단 하나의 정답만을 내세우기 힘든 문제입니다만, ‘표준 영어 발음’으로는 ‘허큘리즈’에 가깝지요. ] <프라임> <현대> 영한사전만이 올바르게 표기했다. <본문 198쪽>


이처럼 일관성 없는 그리스어, 라틴어 표기를 지적하면서도 정작 ‘그리스’(Greece) 자체도 영어식이라는 건 빼먹으셨네요. 고대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현대 그리스어로는 ‘엘라스’나 ‘엘라다’라고 하지요. 하긴 ‘멕시코’도 본토에선 ‘메히코’라 한다죠. 그렇지만 ‘엘라스’ ‘메히코’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 현실상 힘든 문제이긴 합니다. 헤라클레스 하면 몇 년 전에 조영남이 티브이에서 서양 사람한테 자기가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장사라고 농담을 던지는데 그 서양인은 헤라클레스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더라고 하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 때 한국계 미국인 교수에게 영작문 강의를 들었는데, ‘잔다르크’라고 하는 동기한테 Joan of Arc(‘조우너박’으로 들립디다)라고 알려주시더군요. 안정효씨가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이 순엉터리라고 혈압을 올리시곤 하는데, 이건 그렇게 짜증내고 다그친다고 해결된 문제는 아닙니다. (거의 모든 세상 문제가 그렇지만요.) 한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도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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