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한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를 쓴 작가의 장편을 읽었다. 우선, 아주 리드미컬하게 읽혔다고 말해야겠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마 각 장의 길이가 비슷하고, 각 장들이 이어져 있으면서도 뭔가 독립적인 ‘그 장만의 소재’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것 같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퀘스트를 하나씩 깨고 다시 진행되는 느낌과 유사했달까. 각 장들이 뭔가 수평적인 위치에 놓여져 있다는 인상. 멋진 세공품들이 진열돼 있는 가게에 들어와 하나씩 둘러보는 느낌과 유사하기도 했다.

  가장 박장대소했던 장은 역시 ‘연필꽂이의 쓸모’라는 장이었다. 이 장에서, 주인공인 하석은 사발만 한 도자기로 된 학교 개교 기념품인 연필꽂이로 라면을 끓이는 법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한다. 학교를 엿먹이는 방식이 하도 기가 막혀, 한동안 책을 내려놓고는 깔깔댔다. 물론 이로 인해 하석이 사감실로 불려갔을 때, 그곳에서 사감의 초라한 진실을 목도하는 순간의 슬픔 또한 큰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 작가는 엉뚱한 생각을 잘하는 듯하다. 이것이 얼마나 웃기고 기발했던지, 나도 당장 집구석 어디선가 항아리를 꺼내다 끓여 먹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테니스장이 있는 그림자 안치소’ 또한 훌륭했다. 여기선 무거운 그림자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그 그림자들을 맡아서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다는 하석의 상념이 등장하는데, 무척이나 감각적인 상상이라 감탄하며 읽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정말이지 시적이지 않은가. “나와 그림자들은 테니스공이 테니스 라켓을 치는 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보다 훨씬 듣기 좋은 소리다. 그림자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활력을 되찾는다.” 이러한 소재로 다른 단편이나 장편을 하나 더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석은 뭔가 완벽한 척 하려 하지만 실은 그 틈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그런 어설픔을 인간적인 매력으로 지닌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하석을 응원하게도 되고 질책하게도 된다. 프로작이 “넌 좀 막살 필요가 있을 것 같아.”라고 한 말을, 나도 똑같이 하석에게 해주고 싶다. 안전한 삶이 주는 매력이 있을 것이다. 더 공고하고 정교해지는 매력. 그러나 때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궁창 속에서 발견되는 재미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후자의 세계가 전자의 세계를 더욱 넓고 빛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감히 한번 생각해본다. 나도 인간보다 책이 편한 종류의 나약한 인간이라 그런 것일까. 책에 둘러싸인 하석이 좀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이미 끝난 소설의 주인공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떤 방식을 통한 것이든, 하석이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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