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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 좋은 이별을 위해 보내는 편지
이와이 슌지 지음, 권남희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11월
평점 :
창밖은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였다.
그래봐야 오타루의 설경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라한 풍경이지만, 이 책을 읽은 날이 그런 날이라서 좋았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카시와바라 타카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 시절 첫사랑의 아이콘이었던 그 남자는 내 기억 속엔 아직도 흔들리는 커튼 뒤에서 책을 읽는 모습으로, 흘낏거리며 이츠키를 훔쳐보던 모습으로, 자전거 보관소에서 여자 이츠키가 페달을 돌려 라이트를 켜면 남자 이츠키는 엉뚱하게도 그 불빛 아래서 정답을 맞춰보고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몇 번이나 영화로 본 덕분에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가는 동안, 영화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 이츠키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여자 이츠키 머리 위로 종이봉투를 씌우는 장면]이 없어서 좀 아쉬웠지만) 그 아름다운 음악도 함께.
내용이야 유명해서 굳이 다시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여자 이츠키가 추억을 되밟아가는 장면들이 참 좋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가 1인 2역이란 것을 안 순간, 여자의 직감은 바로 작동한다. 여자 이츠키가 그닥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들을 밟아가는 그 과정들이 결국엔 자신은 눈치채지 못한 남자 이츠키의 첫사랑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임을 말이다. 그래서 여자 이츠키가 추억을 되밟아가는 과정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점점 그 시절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질 때, 살짝 설레는 순간을 애써 부정하는 모습까지도 영화 속엔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남자 이츠키가 사랑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기억 속 그 소녀였다는 사실을 묵묵히 읽고 있는 편지로 깨달아야 하는 히로코가 살짝 안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건 오롯이 히로코가 감당해야 될 몫이다. 같은 얼굴로 등장해도 나에겐 이츠키의 추억 찾기가 더 소중하니까.
결국 이 이야기는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해도, 남자 이츠키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리하여 히로코에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이야기가 되고, 여자 이츠키에겐 뒤늦게 알게 된 첫사랑이지만 마음에만 담아두어야 하는 지난 이야기다.
히로코는 도서 카드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서야 확신을 하게 된다. 이츠키가 도서 카드에 적은 이름은 본인의 이름이 아닌 남겨진 이츠키의 이름이었음을, 그리고 이미 짐작했던 대로 자신은 그 여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설산을 향해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외치는 히로코의 모습이 그저 놓지 못하는 미련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반복해서 영화를 볼 때마다 느낀 그 애매했던 마음은 영화의 내용을 이야기한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것은 이츠키가 죽어서도 안녕하길 바라는 히로코가 보내는 마지막 안부 인사이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별 인사였다고.
이츠키는 히로코가 보낸 편지에 "당신도 역시 그를 좋아했었죠?"라는 말에 발끈하며 자신과 같은 이름의 남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한다. 그때 할아버지는 마당에 심어진 나무를 보여주며 그 나무는 이츠키가 태어났을 때 심어서 이름이 이츠키라고 알려준다. "그런 일은 남모르게 할 때 의미가 있는 거"라는 말과 함께.
훗날 후배들이 한 권의 책을 들고 찾아왔을 때 이츠키는 죽은 이츠키가 했던 의미 있는 일에 대해 알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있던 자신을 찾아와 굳이 책 반납을 부탁했던 이츠키. 하필이면 그 책의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는 것에서 뭔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땐 아버지와도 이별하고 이츠키와도 이별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을 땐 이미 모든 것과 이별을 한 것 같은 느낌. 이츠키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이별을 히로코를 통해서야 알게 된 거다.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이젠 구분이 안된다. 다만,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뒷이야기가 없어서 더 낭만적인 거 같긴 하다.
그런 영화 속 주인공을 연기했던 인물이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긴 했지만....
출판사에서 책만 받아 읽고 쓰는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