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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평점 :
“나는 인간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닌 고통의 맛을, 사랑했다.. 그건 혀로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온몸으로, 몸으로, 몸, 몸으로 느껴지는 맛이다”(317).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의 만주를 배경으로 쓰인 이 소설은 한국, 중국,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들 셋의 자전적인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요리와 미륵불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 그리고 천재 광동 출신의 요리사 첸, 위안부였다가 풀려나 첸의 아내가 된 조선 여인 길순이 [칼과 혀]의 주인공들이다.
일본은 위축돼 있는 상태였고, 사령관 모리와 관동군에 배치돼 있는 군사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도, 과연 이 전쟁이 끝날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음식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하는 모리 사령관은 자신의 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시설 내의 음식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황궁 근처를 배회하던 수상한 자들이 붙잡히고, 둘 중 하나는 자신의 정체를 요리사라고 밝히며 요리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 재료가 마땅치 않고, 더 이상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자들이 몇 되지 않아, 제대로 요리다운 요리를 하고 싶다며 제 발로 찾아온 요리사. 자신을 광동인이고, 이름은 첸이라 밝힌 이 요리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리 사령관의 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을 때에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신경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단 한 가지만을 사용하여 기름은 물론이고 어떤 양념도 사용하지 않은 채 재료를 익힐 불, 그리고 칼만을 이용해 1분 내로 만들어 입증해야 하는 ‘광동 최고의 요리사’라는 이름. 그 제안을 받아들인 첸.
다행스럽게도 첸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많은 사령관들이 한데 모이는 큰 만남의 장이 열렸다. 내놓아야 할 음식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함께 주방에 들어서게 된 첸은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목적을 이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길순에게 ‘독’이 적힌 종이를 남기고는 훌쩍 떠난 첸은, 독을 이용해 일본의 사령관들을 암살 시도를 한다. 자신의 목숨, 또 늙은 어머니와 아내 길순까지의 목숨을 걸고 벌어지는, 칼과 혀 사이의 투쟁.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아야만 했던 첸은, 과연 그의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다만 외로웠을 뿐이라고... 싸우던 나의 시간도, 맵거나 짜거나 달콤했거나 시었을 온갖 요리의 맛들도, 우리를 아프게 했던, 시대가 만들어낸 순간의 고통일 뿐이라고. 한 접시의 요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319).
사실 내가 접했던 일본의 패망 직전의 시대에서 쓰인 책들은 대부분 조선인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았지만,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모두 만나는 만주라는 지역에서 중국인과 일본인과 한국인의 시선 모두를 이용해 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새롭게 느껴졌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먹었던 사령관 모리와, 고통을 참으며 요리했던 첸,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길순의 모습까지 한데 어우러져 [칼과 혀]를 술술 읽히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묵직한 감동까지 함께 선사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