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102). 열아홉 살의 폴은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에 맞춰 부모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어머니에 의해 테니스 클럽에 반강제로 입성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을 한 여자를 만난다. 이렇게만 보면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둥 온갖 호화스러운 수식어를 갖다 붙여서 둘의 만남을 시작하고 기념할 평범한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줄리언 반스의 소설 아닌가, 그리 평범할 리 없다. 상대는 마흔여덟 살이자 이미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유부녀 수전 매클라우드. 사랑과 진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나는 진실을 본다(142).
너는 아직 인생의 이론이 없고, 그 기쁨과 고통 몇 가지를 알 뿐이다. 그러나 너는 사랑을 믿고,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 사랑이 어떻게 인생을, 실제로 두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224). 수전을 끔찍이도 사랑한 폴은,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함을 소유하고 있는 남자였지만, 수전의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 그녀의 몸에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얼마 되지 않는 비상금을 털어 런던으로 향한 수전과 폴.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과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폴은 차츰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다시 분명해지고 합리적이게 된 폴(224). 수전이 술을 입에 달고 살고 서서히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가자, 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끝내 좌절하고 분노한다. 무력감, 좌절감에서 나온 분노가 너를 압도한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이게 정당한 분노라는 것이다. 너는 너 자신의 정당함을 증오한다(283). 끝내 자신마저 증오하게 된 폴. 과연 폴은 어떠한 선택을 내리게 될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아니면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실이지만, 어느 것이라고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368).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은 일흔 즈음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는 이 책이, 진행되면 될수록 화자가 ‘나’에서 ‘너’로, ‘너’에서 ‘그’로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젊었을 때의 패기와 당당함으로 나이를 뛰어넘고 사람들의 경악 속에서 이어나갔던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나’로 이야기를 하다가, 갈등이 시작되었을 즈음부터는 ‘너’라고 표현하며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진행하다 <연애의 기억>은 ‘그’로 끝을 맺는다. 가슴 아프지만, 덤덤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처음 함께했을 때의 그녀를 알고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그들 둘 다에게, 마지막 의무라는 것. 그런 순수의 얼굴이 훼손되기 전(294). 어떻게 보면 시작할 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었던 <연애의 기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각자의 연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화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각자 상황이 모두 다 다를지는 몰라도, 사랑을 시작했을 때의 행복감과, 관계에서의 불화,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을 겪는 화자의 심리적 묘사와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과거의 내 이야기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전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대실패로 끝났다 해도, 흐지부지되었다 해도, 아예 시작도 못했다 해도, 처음부터 모두 마음속에만 있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단 하나의 이야기였다(341). <연애의 기억>을 통해 누군가의 단 하나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조용히 나만의 이야기를 되살려봤다. 사랑에 심취했고, 사랑에 푹 빠졌었고, 사랑의 끝을 경험해 본 화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더 신빙성 있는 듯이,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가 <연애의 기억>을 통해 던지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려 애를 쓰다 보니 어느덧 끝이 났다. 사랑을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13). 초반에는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애의 기억>을 다 읽고 나니 대답하기 참 곤란한 질문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