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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평점 :
아마도 요 몇
년간 가장 인기있는(잘 팔리는?) 인문사회분야 주제 중 하나가
페미니즘 일 듯싶다. 하지만 쏟아지는 책들 중 상당수는 여성용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책들이거나,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된 여성적 차이에 대한 책들이다. 또한
우리 현실을 돌아봐도 각종 미디어나 기사를 통해 페미니즘이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부족하다거나, 성공한
여성의 숫자가 적다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권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페미니즘이란
의제를 사회적 이슈화하고 아젠다를 만들어 가는 이들은 절대적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의 소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이들이다. 그러다보니 페미니즘은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먼 식자층 여성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99% 페미니즘 선언]이 말하는 바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정체성
정치의 하나로, 또는 기껏해야 그 정체성의 교차성의 문제로 페미니즘을 다루는 기존의 입장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이든 그것은 선이고 옹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주장이라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은 지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대다수 여성을
포함한 우리의 현실의 불평등을 낳고 강화하는 주된 적은 바로 신자유주의이고 그것의 근원은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신자본주의에 기생하여 수탈에 동조하고 기득권을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기에 저자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현실 기득권의 한 축으로 자리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대표사례가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나 페이스북의 여성COO인 셰릴 샌드버그 같은 여성들이다. 여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류페미니즘의
흐름들과는 달리 저자들이 주장하는 99%를 위한 페미니즘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보편성은 여성이 아닌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식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인종적, 성적, 계급적
불평등에 맞서 현장에서 투쟁하는 보편성이요, 이 보편성을 통한 연대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지점을 탐색한다는 목표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적확하고 계발적인 주장들 속에서도 두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첫째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과 같은 사회적재생산에 대한 노동의 이해에서, 마르크스가
이를 무시하거나 폄훼하였다고 혹은 아무리 잘 봐줘도 시대적 한계였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사실 이런 오해는
자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오해이기도 한데, 마르크스의 ‘가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재생산노동이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말은 일상용법에서
그 노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포획되지 않았다는 말이며, 때문에
이 영역을 재상품화 하는(예컨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노동화)게
맞을지 비상품화 영역으로서 저항의 영역으로 다루어야 할지는 전략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다. 책의 앞부분에서 논의되는 바와 후기에서의 이해가 약간 다른 뉘앙스를
주기는 하지만 계급투쟁이 마치 생산현장에서 노-자의 권리투쟁으로 국한되어 이해되고, 따라서 계급투쟁, 성적다양성투쟁,
인종투쟁, 여성해방투쟁이 모두 권리투쟁의 하나로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계급적대”란
단순히 서로 다른 계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계급 사회 구성의 바로 그 원리인 것처럼, 적대 그 자체는
단지 갈등하는 분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계급적대에 기반한 계급투쟁은
이러한 갈등의, 그리고 그 안에 연루된 요소들의 바로 그 구조화 원리이다.
이 사소한(?) 오해를 제외한다면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너무도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특히나 미국식 페미니즘이 우리사회에 수입되면서 이러저러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처럼 평등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모색하는 99%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짧고 큰글씨인 데다가 11가지의
테제와 후기로 구성된 이 책은, 배경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하의 불평등의 가속화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모색이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진행형인 상황이기에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어질 편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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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좋은 번역임에도 이상한 번역 하나 aura”아우라”를 “오라”라고 음독한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