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적인가 -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폴리테이아 총서 2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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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계절이 다가왔다. 한데 왜 우리는 매번 선거를 치르고 민의가 반영된 선택된 후보를 선출한다면서도, 그 후보가 선택된 후에는 항상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일까? 또 선거가 치러진 후 몇 년간 잊고 있다가 투표할 때만 자신을 주권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믿고 있는 선거라는 제도는 절차의 공정하게 진행되기만 한다면 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베일은 아닐까?

 요컨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채택한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추첨)이었다. 제비뽑기는 권력이 집중되는 장소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을 도입함으로써 고정화를 막는 것이다. … 만약 무기명 투표에 의한 보통선거, 즉 의회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그의 책 [트랜스크리틱]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또한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고진의 이 주장을 옹호하며, 추첨이야 말로 민주주의라고 갈파한다. 이들의 주장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두 급진적인 철학자들의 기행일 뿐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읽어 보시길 권한다. 마넹은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거쳐 17~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과 독립전쟁을 거친 미국의 건국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추첨제와 선거제가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추첨제가 완벽하게 정치적 주제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마넹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여러 낯선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추첨제=민주주의, 선거제=귀족주의라는 주장을 접하게 될 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주장이 15세기 이전까지 정치학의 일반적 공리였다는 점이며,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몽테스키외나 루소 역시 이러한 견해를 잘 알고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선거제는 투표자와 대표자의 간극을 극복할 수 없으며, 탁월한 자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항상 자연귀족제로 향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당대의 엘리트들은 추점을 배제하고 선거를 선호하는 것이 질서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건국과정에서의 논의들을 통해 선거가 세습 귀족과는 다른 형태로 특권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상세히 입증하고 있다.  

마넹이 아테네와 중세도시국가들이 추첨제를 자기검열과 심사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어떻게 보완하고자 했는지를 설명하며, 아테네 시민들이 전문가에 의한 통치의 위험과 그것을 어떻게 피하고자 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지점에서는 지금 우리의 문제들과도 겹쳐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추첨과 선거라는 대립구도의 검토는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라는 대립구도보다 더 발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다소 엉뚱하고 생뚱맞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 사실은 충분한 역사적-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는 클래식한 주장이었던 것이며, 마넹의 책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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