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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을 본다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의 메멘토란 영화를 기억한다. 주인공인 레너드는 10분전 일을 기억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다. 아내가 살해당한후 충격으로 뇌기능이 손상된 것이다. 그는 살인자를 쫓는 과정에서 찾은 단서를 사진이나 자신의 몸에 문신을 통해 ‘기록’한다. 당시 필자의 해석으론 아내를 살해한 범인은 주인공 자신이었다. 결국, 자신이 아내를 죽였단 사실과 자괴감의 충돌이 ‘행위’의 기억을 삭제하고, 기억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죄없는 가상의 살인범을 앉혀둔 것이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이 믿는것과 현실이 충돌할 때, 실제 발생한 사실(Fact)를 외면하고, 주관적 추상을 따르는 것이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사실(아내살해)을 부정하고, 믿음(살인범의 존재)을 쫓는 전형적인 인지부조화를 보여준다.
인간은 실질적 객관 보단 주관적 추상을 신뢰하곤 한다. 메멘토가 개봉한지 4년뒤에 우린 집단적 인지부조화를 마주한다. 황우석 사태가 그것이다. ‘인위적 조작’이라 했지만 실상 본인의 ‘능동적 조작’인 줄기세포의 ‘뻥’이 공개됐다. 노벨상이 거론되던 우상의 신화가 낱낱이 벗겨졌다. 행위자들의 진술, 과학적 검증과 사법적 단죄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될 점은 팬덤으로 까지 번진 대중들의 행태, 또는 자발적 동의이다.
국익 혹은 애국이란 맥거핀
왜 대중들은 과학자라기 보단 정치의 관성을 철저히 습득한 테크니션의 ‘국민사기극’에 무기력한 관객으로 초대되었는가? 아니, 관망을 넘어서 동조와 비호를 하게된 역설의 배면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태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게임의 참여자들이 공모를 이루는 지점이 있는데 이point를 나는 erotogenic zone이라 칭했었다. 경제효과 300조가 상징하는 국익이란 a축과 애국을 가장한 쇼비니즘이란 b축의 접합점에서 신기루 같은 불꽃은 타올랐다가 급격히 소진됐다. 연기는 바람에 날려가기 마련이다.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에서 나오는 ‘구성된 권력’은 우리네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최근의 박정희 향수에서 나타나듯 대중들은 ‘산업 근대화’란 가정을 일군 ‘아버지’를 갈망한다. 군부정권의 이데올로기 확산과 감시와 공포란 장치로 억압체제를 유지한 공격적 측면이 체제유지의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은 ‘독재’는 개인의 야욕만이 아닌 경제발전이란 구호를 믿고 따라와 준 대중들의 밑으로 부터의 동의가 강한 기반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의 구성요소인 자발적 지지란 메커니즘은 ‘국익’이란 토양, 혹은 발전과 진보란 밑거름으로 싹을 틔운다. 요컨대, 지배층은 경제발전과 애국심을 앞세운 국가주의 지배담론으로 기층계급을 장악했고, 대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흡수된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너무도 강고해 지금도 어떤 화학작용을 계기로 사람들의 정치적인 erotogenic zone을 자극시키면, 사회는 정해진 프레임에서의 정형화된 양태를 보인다. 황우석 사태에서 초기국면부터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잡았던 건 바이오 산업을 선도하는 리더란 것과 그것이 창출할 근거없는 통계수치였다. 사람들은 지겹도록 ‘국익’을 말했고, 우린 지겹도록 ‘국익’을 들었고, 지금도 듣고있다.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FTA 같은 국가적 사안에서 번번히 등장하는 그것은 실상 리얼리즘을 가장한 추수주의적 독선이다. 대국적 국면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해서 객관적 이성의 벽을 허물어 뜨리는 맥거핀 으로서의 국익은 ‘국익’에 전혀 도움안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과학의 사회화
중세의 신학중심의 질서에 철학은 압사당했다. 국가주의의 광풍이 불던 유신시절 과학은 권력의 시녀였고, 국가 발전의 도구적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획득했다. 즉, 경제신장의 방편으로 과학이 동원된 것이다. 이 때부터 뿌리내린 전근대적 시스템의 폐습이 이번의 악재를 부른측면도 간과할수 없다. 정부의 지원없이는 연구를 지속할수 없는 현실, 보스중심의 도제적인 연구실내 문화, 국외평가의 지나친 의존, 같은 학문내에서도 선을긋고 남의 집을 넘어다보지 않는 지식인들의 폐쇠주의와 조작으로 부풀린 성과로 확장한 사업에 줄을선 지식인. 단기적 이익중심의 단발마식 정책 등의 문제는 왜 이공계의 위기란 말이 회자되는지를 알려주는 징후로 드러났다. 한학수PD는 황우석 사건을 정, 학, 언의 삼각동맹으로 규정한다. 정부의 묻지마식 투자, 언론의 공적작용의 실패, 학문의 권력에 대한 종속의 부패고리는 구성원들의 가슴에 짙은 음영을 남겼다. 이는 과학의 사회화와 정치의 회복이 시급한 것임을 보여준다. 과학주의란 장막은 전문성의 포장으로 대중의 무지를 가리기에 충분히 넓었다. 폐단을 예방하기 위해선 민주주의란 시스템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깨어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과학을 끌어내려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되돌려 놓는 사회화가 요청된다. 결국, 문제는 노벨상 탄 스타과학자 한명을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누구나 높은 성취를 달성할 과학자를 배출할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이다.
나치즘은 철저한 과학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었다. 파시즘의 이론적 근거가 된 우생학은 우월한 게르만족이 열등한 타민족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로 후에 홀로코스트란 야만의 역사를 남겼다. 나치즘의 광기에서 보듯 전체주의와 과학의 결합은 치명적인 결과로 끝나기 마련이다. 밀레니엄의 세기를 사는 한국사회는 파시즘의 화초가 자랄 최적의 온실이다. 이것은 반대로 아직 한국사회는 투쟁을 벌일 전쟁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서평을 가장한 잡설을 홉스봄의 말을빌려 갈음하고자 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