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서 외교하면 가장 떠오르는 인물은 외교담판으로 알려진 '서희'다. 서희는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거란의 대군을 물리쳤다. 서희는 어떻게 거란과 협상했길래 지고 있던 전쟁에서 영토까지 얻을 수 있었을까?
서희의 전략은 로펌의 전략과 다르지 않았다. 서희는 우선 전쟁이 발발한 이유,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철저히 분석한다. 만리장성 넘어 북방 시베리아는 기후와 땅이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유목이 발달한다. 유목은 농업에 비해 인구 부양력이 모자라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거란족, 몽골족, 만주족 등 북방에서 발흥한 유목국가의 중원 침략은 국운과 직결된 문제였다. 중원 공략이 성공하면 대제국이 됐고, 실패하면 분열되어 변방의 작은 부족 국가로 쇠퇴했다. 국운이 달린 문제이기에, 거란족 유목국가 요(遼)가 풍요로운 중원국가 송(宋)을 침략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요(遼)의 입장에서 송(宋)과 상당히 관계가 좋았던 고려는 후방을 위협하는 나라였다. 고려를 무시하고 송(宋)을 공략했을 때, 고려가 후방에서 요(遼)를 공격한다면, 요(遼)의 전선은 두 개가 되어 중원 공략에 실패할 수 있다. 따라서, 요(遼)는 중원 공략에 앞서 고려를 공략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다. 고려와 전쟁이 길어질수록 중원 공략도 힘들어지기에, 요(遼)는 보급을 포기하고 기마군단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전격전 방식을 선택한다.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빠르게 개성을 향해 남하하는 요(遼)의 대군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고려는 혼란에 빠진다. 성종과 고려 조정은 대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항복할 때 영토를 어디까지 할양할 것인지가 고려의 핵심 쟁점이었다. 이때 맞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며 고려 조정을 진정시키는 인물이 있었으니, 서희다.
서희는 고려가 농성에 들어가 장기전이 되면 보급이 취약한 전격전 방식을 선택한 요(遼)에 상당히 불리하다는 점, 중원 공략을 원하는 요(遼)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준다면 전쟁의 이유가 없어진다는 점을 들어 항복을 생각하는 조정을 설득해 장기전에 대비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거란과 협상에 들어간다.
대중에게 곧잘 요(遼) 장군 소손녕이 멍청한 인물로 소개되지만, 절대 아니다. 요(遼)에게 중요한 건 중원 공략이다. 고려가 후방의 안전만 보장해 준다면, 굳이 중원 공략 이전부터 고려와 전쟁하며 기운을 뺄 필요가 없었다. 고려와 전쟁하면서 중원 공략을 위한 병력을 보전하는 것도 요(遼)의 중요한 과제였다. 서희는 이 점을 정확히 파고든다.
서희는 송(宋)과 바다로 교류할 수 있지만 요(遼)는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 교류하지 못함을 강조한다. 요(遼)와 직접 교류할 수 있다면 거리가 먼 송(宋)보다 요(遼)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며, 작금 신의주 지역인 강동 6주를 여진으로부터 빼앗는 걸 묵인해달라 요청한다. 요(遼)는 국경을 맞댄다면 고려를 더 통제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고, 고려가 강동 6주를 차지한 뒤 요(遼)에 사대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철군한다.
고려는 이후에도 송(宋)과 친밀하게 지내며 요(遼)의 속을 썩여 전쟁이 4차까지 이어졌고, 이때 고려가 획득한 강동 6주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작용했다는 건 뒷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