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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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정치적 의미


 <역사의 종말>로 세계에 알려진 정치학자가 인간이 느끼는 '정체성'이 정치 현상에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한다. 포퓰리즘, 파시즘 등 다양한 정치 현상을 '정체성'으로 설명한다. 국민이 어디에서 '정체성'을 느끼냐에 따라 국가의 번영과 쇠락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국민 정체성' 없이 '제한된 정체성'1이 국가 내 난립하면 지옥문이 열린다.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의 '아사비야(Asabiyyah)'와 저자가 언급하는 '국민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 매우 유사하다는 게 특징이다. 


 저자는 미국의 좌파와 우파를 모두 비판한다. 예를 들어, 흑인과 여성같이 사회적 약자라는 제한된 정체성을 강조하는 좌파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고 오히려 혼란을 불러올 뿐이라고 비판한다. 흑인과 여성의 프레임을 견지할수록, 사회에서 소외된 백인과 남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반발을 우파가 이용하면서 비토크라시(Vetocracy)와 포퓰리즘(Populism; 인기영합주의)이 유행한다. 비토크라시와 포퓰리즘이 만연하는 우리나라에도 의의가 있는 책이다.


 철학,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정치학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평소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어려울 수 있다. 글과 번역이 깔끔해서 읽는 데 불편이 없다는 게 위안이다. 어렵더라도, 배울 게 많아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저자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격동으로 이끄는지 배워보자.


정치적 안정과 번영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돼있고 정당한 대우받을 때 안정을 느낀다. 만약 이게 충족되지 않는다면 정체성 혼란이 발생한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거나 기존 질서에 저항한다. 새로운 정체성을 민족에서 찾으면 민족주의가 나타난다. 종교에서 찾으면 원리주의가 등장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심화되면 민족주의와 원리주의가 전체주의로 발전한다. 국가 구성원 모두를 아우를 수 없는 제한된 정체성은 국가를 광기에 물들이거나 혼란에 빠뜨린다. 지난 모든 반란과 학살, 사회혁명의 원인은 제한된 정체성이 만든 차별에 대한 소외된 자들의 저항이었다.


 반면, 통일된 국민 정체성이 국가 내 자리잡혀있다면 정치적 안정과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된다. 중요한 건, 국가 내 특정 집단에 속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이 잡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정체성'이 확립돼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안정을 제도(制度) 또는 강력한 권력에서 찾는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의 기초 토대는 '국민 정체성'이다. 전 국민을 한데 묶는 정체성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진다. 강압적인 통제는 일시적으로 혼란을 잠재울 뿐이다. 정체성 없는 제도는 따르는 사람이 없어 효력을 상실한다.


 국민 정체성이 확고할수록 정치는 안정된다. 정치가 안정될수록 국가는 번영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 동안 형성된 민족적 국민 정체성이 있었기에 빠르게 유럽을 추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자유라는 신념이 국민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기에 세계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국민 정체성이 없고 제한된 정체성만 존재한다면, 사회에 갈등이 빈번해진다. 같은 소속 아래 다른 정체성은 배척과 차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잠재울 방법은 어떻게든 국민 정체성을 확립하던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억압 또는 말살하는 것밖에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는 '한민족'이라는 국민 정체성 하나로 숱한 위기를 극복해왔다. 일제강점기의 치밀한 민족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국민이 모두 모여 6.25 전쟁, IMF 외환위기 등 국가적 재난을 극복했다. 하지만, 이제 국민 정체성은 약해지고 제한된 정체성이 강성하다. 지역감정, 진보와 보수 등 끊임없이 배척하고 차별하며 갈등을 양산한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인기영합주의 정치인이 득세하는 지금, 우리나라는 다시 국민 정체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1. 저자가 이야기하는 국민 정체성과 제한된 정체성은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단일 종교에 가까운 나라에서 종교는 제한된 정체성이 아닌 국민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단일 민족에 가까운 나라에서 민족은 국민 정체성이다. 하지만, 다종교와 다민족국가에서 종교와 민족은 제한된 정체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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