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붕대 스타킹 반올림 31
김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 아이들은 성범죄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가? 많은 사람들은 동일한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전혀 아니라고. 누군가의 더럽고 추악한 욕망은 성인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어리고, 더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까지 손길을 뻗는다. 누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얼음붕대 스타킹>은 명문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니는 열일곱 살 선혜의 그 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 고시원을 가는 중에 술 취한 남자 2명에게 성추행과 폭력(성폭행 미수)을 당하고 가까스로 도망쳤으나 자신에게 남은 기억과 누군지 모르는 가해자, 또 다른 가해를 하는 주변인들에 의해 차갑게 얼어 붙어버린 선혜가 자신의 스위치를 찾아 자신을 감싸던 얼음붕대와 자신을 보호해주던 검은 스타킹을 벗어버리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이다. 


 차가워진 선혜의 마음이 내게 너무 와닿아서일까. 내 마음도 차가워져 책을 한 장 넘기는 게 매우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을 망가뜨리며 해소하려는 미친 가해자들과 불확실한 증거라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할 것 같다며 피해자 앞에서 혀를 끌끌차는 경찰, 그렇게 숨기고 싶어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허락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친구에, 하나의 가십거리로 여기며 소문을 파헤치고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친구, 절대적인 내 편일 줄 알았던 엄마의 회피와 무신경함. 선혜의 시점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인지 마치 내가 겪은 것 같이 이입하며 읽었다.


 생각해보면 우린 성추행을 좀 더 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내 주변은 말이다. 강간당한 게 아니니까. 아마 그만큼 성추행이 더 만연하게 일어나기 때문이겠지. 그 정도는 마치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성폭행뿐 아니라 성추행, 성희롱, 언어적 성폭력 등도 겪은 사람들은 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나 역시도 직장을 다니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늙은 남자가 내 허벅지를 쓸었던 일, 등을 만진 일, 주말에 개인적으로 연락와 데이트하자는 등의 일들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주변에 말을 꺼내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자.’라는 반응을 겪어서 그런지 더 기억에 남기도 하고. 


 결국 이런 문제는 1차적인 원인, 가해자들이 문제다.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들을 인간으로 대접해줄 필요가 있는가?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왜 웃으며 살아가는가. 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가. 가해자는 가해자일 뿐, 죄를 지었으면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또한 남의 상처를 희화화하며 장난치는 사람들에게도 그에 따른 처벌이 있어야 한다.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사람들. 피해자를 걱정하는 척하며 피해자를 까내리는 일이나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말을 하는 것 모두. SNS가 발달하면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일이다. 


 언제쯤 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오긴 올까? 한참을 생각해봐도 죽을 때까지 없을 것만 같다.

 

 # 살려달라는 말이 아주 무겁다.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책을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던 모든 일이 포함된, 슬픔과 기쁨과 절망과 희망을 모두 담고 있는 말. 여태껏 소중한지 몰랐지만 지금은 모든 단어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망설이지 않고 ‘살아 있다’를 고를 것이다. - p25

 

#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온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지닌 빛과 어두움을 모두 알아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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