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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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특히, 편지를 받는 건 더더욱. 고등학교 때부터 편지를 쓰는 걸 좋아했고 인터넷으로 펜팔도 하면서 육지와 떨어진 섬에서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하기도 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오히려 편지지에 손이 잘 가지 않아 편지를 써본 적이 언제쯤인지 생각도 안난다.

누군가에게 진지하고 좀 더 깔끔하게, 좀 더 정돈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편지라는 것은 그 편지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준다. 이 책을 읽던 내내 내 마음이 간질간질했던 건 그 때문일까.

가제본으로 만난 128호실의 원고는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편지를 엿보는 느낌이 들어서 뭔가 묘하지만 모든 상황이 편지로 이루어지기에 각 인물들의 마음이 더 와닿았다.

처음으로 편지를 시작한 인물은 안느. 보리바주 호텔 128호실의 협탁 서랍에서 누군가가 쓴 원고를 발견한 안느 리즈는 원고에 나와있는 주소로 소포를 보낸다. 그 원고의 주인은 안느에게 충격적인 소리를 전하는데, 그것은 자신은 중간까지만 작성을 했으며 원고가 발견된 호텔 근처는 전혀 간 적이 없다고 한다. 1983년에 잃어버렸던 그 미완의 원고가 완성이 된 채로 2016년, 한 호텔에서 발견이 된 것이다. 안느는 미완의 원고를 완성시킨 또 다른 작가를 찾아나서는데....

책의 구성뿐만 아니라 내용이 굉장히 독특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이 이야기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30년 전에 잃어버렸던 원고가 다양한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원고의 주인에게 돌아온 것. 그것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완성이 된 채로!

이 원고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이 원고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는다. 다시 사랑을 하게 되거나 아이를 만나기 위한 용기를 내는 등 하나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행동의 변화까지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인연이 되고 결국엔 운명이었을 일련의 사건들. 이 원고의 내용이 크게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실베스트르의 첫사랑 이야기가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지 정말 궁금해 미쳐버릴 것 같다. 등장인물들과 같이 나에게도 변화를 이끌어 줄 하나의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

원고의 비밀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이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또 다른 경험이 되었으며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들어주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해주는데 이 모든 것의 일등공신은 안느의 호기심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안느의 실행력과 끈기였다. 나였다면 원고를 발견했어도 '이게 뭐람?'하고 대충 읽어보고 놔뒀을 것이다. 마기와 함께 거꾸로 파헤쳐가며 또 다른 작가를 찾아가는 모습은 정말 셜록 홈즈와 왓슨과 같은 케미를 보여줬다. 포기했을 만도 한데... 안느라는 인물은 대범하고 용기가 넘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멋진 사람이었다. 나 역시도 안느에게 홀려버렸지.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얻고 책을 통해 나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듯이 말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내가 읽는 '이야기'들은 조용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하게 내게 다가온다. 굉장히 신기하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글 하나가 내 전부를 바꿔주니까. 작가님들이 새삼스럽게 대단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왜 이런 즐거움을 이제서야 느끼게 된 걸까? 작가와 등장인물과 이야기에 흠뻑 젖어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는 신기한 경험. 내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 많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를 변화시켜줄 새로운 글을 찾아 떠나야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구석에 있던 편지지를 꺼내 새벽 감성과 함께 편지를 쓰고 잠을 자야겠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이 되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쳐다보고, 그들을 알아가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몰두하느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지. 그래서 그들과 멀어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고. 여기 있으니 일부러 자신을 고립시키고 생활하는 네가 떠올랐고, 네가 부러워졌어. 조금은' - p70

'기억을 갉아먹는 암 덩어리만큼 비열한 게 또 있을까? 매일매일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리잖아.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사라지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야.' - p145

'안경을 바꿀 때가 되면 나이 먹는 걸 깨닫는다고요.' - p197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얼마나 둔감해질 수 있는지 의식해본 적 있나요? 무언가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처럼,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이성에 약간 문제가 생기는 것만 같아요. 당신은 조금 멀리 계시니 더 명확히 보이시겠죠.' - p227~228

'이야기 하나에 우리의 여름날과 가을날을 몽땅 바칠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소설이라는 배가 우리를 태우고 멀리까지 데려가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고 우리를 영원히 변화시킨다는 것도 알죠. 종이 속 인물들이 우리의 추억을 변화시키고,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어요.'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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