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건 조지 오웰의 ‘1984’였다. ‘디스토피아’라고 하던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사하맨션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살아가던 사하들. 이게 과연 픽션일 뿐일까? 가상의 이야기인데도 현실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 마음 졸이며 보았다. 특히, 현재 체제에 불안과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작은 날갯짓을 하던 ‘나비 폭동’의 부분은 민주화를 위해 몸과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유사했다. L2, 사하뿐만 아니라 주민권을 가졌던 타운의 주민들도 거리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던 폭동.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숱하게 보았던 것 아닌가. ‘폭동’이란 말은 지극히도 편파적인 단어이다. 기득권 층,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라는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이 들리면 그것은 폭동이 된다. 5·18 민주화 운동도 그렇지 않던가. 아직까지도 폭동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나비 폭동’ 아니라 ‘나비 혁명’이 맞겠지.
에피소드 형식으로 각 챕터별로 주된 이야기가 달랐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311호, 꽃님이 할머니, 30년 전]이다. 낙태에 대한 이야기.
‘생명은 소중하고 탄생의 순간은 축복받아야 하지만 아이를 낳을지 낳지 않을지는 당사자인 여성이 선택해야 한다는 게 원장의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출산은 고통이다. 숱한 통증과 질병을 동반했다. 인과를 가지고 실선으로 이어지던 여성들의 삶은 출산과 동시에 칼로 잘라 낸 듯 뚝 끊겼고, 아이들의 삶도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항상 최선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227쪽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임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227쪽
정말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여성들의 삶은 출산과 동시에 칼로 잘라 낸 듯 뚝 끊겼다’는 부분이 마음이 아팠다. 출산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출산으로 자신이 쌓아왔던 일상생활, 커리어, 노력 등이 칼로 자른 듯 끊겨버리는 게 현재 우리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아이를 위해 한 여성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아이도 태어나고 나면 잊혀지지만.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가장 대우받는 것이라 느껴지는 때도 많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세 명이 서 있고 비가 온다. 기득권처럼 보이는 풍채 좋은 사람과 임신을 한 여성과 그 여성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 풍채 좋은 사람은 우산을 들어 임산부의 배에 씌워준다. 임산부와 아이는 비를 맞은 채 계속 서있는 그 그림.
‘그 수술이 불법이 아니었다면 좀 더 빠르게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이가 좀 더 안전한 곳에서 수술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움마저 변명 같아 괴로웠다.’ - 232쪽
그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챕터는 [214호, 사라]의 이야기.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 112쪽
사라의 이야기는 어머니인 연화의 이야기부터 나오는데 정말 하말하않이다. 이 부분은 패스. 쓰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마지막의 [총리단] 챕터는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실세에 사람들이 놀아나고 있었으므로. 그걸 안 진경은, 또 그 전에 찾아온 사람들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기득권이야 이 체제가 이렇든 저렇든 자신들에게 이득인 부분이 있기에 크게 영향을 안 받을 것 같지만 L2나 사하들에겐 얼마나 큰 배신이었을까.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 놀아난 기분. 참담하다.
사하맨션을 읽으면서 이런 시스템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다가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이미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을 수도. 유토피아는 없을지언정 디스토피아는 우리 옆에, 아니면 우리 앞에 이미 와있을 수도 있으니까.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 어른들. 누군가의 행복하고 멋진 삶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의 처절함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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