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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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소리를 떠올려 본다. 미세한 입자들이 마주치는 소리. 이른 아침 알싸한 공기 속에서 안개와 꽃향기가 서로 부딪는 소리. 멀리서 오는 종소리 같은, 가까이서 오는 쉿소리 같은, 소리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 준다. 처음 그 집에 발을 들이던 날, 그 순간으로.p7


시작하는 문장을 읽자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낮잠에서 깰 때, 지금 여기는?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시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감각 안에서 어리둥절하지만 안심이 되는 그런 느낌. 무언지 모르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런 낙천성은 엄마의 생애를 통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엄마는 자라면서 매 시기마다 계획한 범위 안에서 일이 이루어지는 걸 경험한 사람이었다. 원하던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했으며 적절한 때에 직장을 구했고 큰 갈등 없이 결혼했다. 결혼한 후에는 계획한 대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자산을 늘려 갔다. 엄마는 이루어질 만한 꿈을 꾸고, 그 꿈들이 현실이 되는 걸 보아 왔다. 엄마의 낙천성은 누적되어 온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p36


아버지는 이 세상에 속고, 이 도시에 속고, 직장에서 속았다고 했다. 그리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아버지는 혼자 장원으로 내려갔다.p49


계획한 범위 안에서 작은 성공을 쌓아온 엄마는 남편의 실패에 동참하지 않고 떨어져 지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정원 있는 낡은 집. 1층은 폐쇄되어 있고 2층을 임대하여 살기로 하였는데, 이사 첫 날 주인공인 첫째가 종소리같은 쇳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동생 준에 의해 1층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와 종려, 자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


숨어 사는 1층의 가족, 가족의 위기 속에 그늘지고 어두운 집에 숨어 있고 싶었던 2층의 가족이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배려하고 위로하는 일상을 만들어간다.  


‘사건의 지평선’


살면서 미분이 안 되는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된다.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가르는 어떤 순간. 

아버지에게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속인 건 스스로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엄마에게는 남편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순간이었다. 스스로 내리지 않은 결정으로 인한 행동은 언젠가 후회를 낳고 그 결정의 당사자를 미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엄마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숨어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주인공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맞는 사건의 지평선을 만나고 넘어간다. 



“집은 잘 있지?”

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이곳이, 이 집이, 뒷산이, 그러니까 동생이 1층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 시공간이 자신에게 전하는 안부가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런 준의 마음이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준은 혼자 이 집에 있는 동안 집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어떤 나무가 어떤 계절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지, 어느 구석에 어떤 풀이 자라고 작은 동물들이 어떤 길로 오가는지, 그리고 서백자 할머니와 장희 씨, 자작과 종려가 어떤 마음으로 이 집에 드나들었을지 헤아렸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혼자 겁먹은 채 집에 남아 있던 동생을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집은 잘 있어?”

라고 묻는 건 떠나온 시공간에 전하는 준만의 통신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p150


누군가가 살던 오래된 그곳. 누군가의 삶이 무너진 자리.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가 주는 따뜻함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할머니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불안해하는 종려와 자작에게 주인공이 들려준 말을 나에게, 옆의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속삭여주고 싶다.


“아무 걱정 하지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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