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울을 말할 용기 -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온 우울증, 그 우울과 함께한 나날에 관하여
린다 개스크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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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1.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날.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차 안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던 그때으 불안감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나는 이제 이 도시에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속도와 규칙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기억2. 

친밀한 관계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 우울증이었다. 약을 먹는 그를 걱정하자 생물학적인 결핍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이니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위로를 했다. 우울증이 심할 땐, 내내 잠만 자는 그에게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냐며 물었더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고.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그대로 두라고 했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그의 상태와 함께 나도 가라앉았다. 무력감.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기억3.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과의 자리에 함께 했었다.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거리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힘들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회적 죽음에 공동체가 함께 슬퍼하지도 위로받지도 못한 죽음이었다.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통함이 남은 죽음.


책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이다.


강하고 굳센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통념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에 대한 차별적 시선 속에서, 더군다나 약한 사람으로 보일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하는 의료계에서 저자는 자신의 우울증을 고백한다. 당사자의 이야기다. 정신치료의 주체이면서 대상이다. 이중의 당사자성. 

그래서 우울증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왜 일어나는지,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준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이 치료한 환자의 사례와 우울증과 함께 한 자신의 치료 과정이  담백하고 인간적인 말투로 차분하게 펼쳐진다. 글을 읽으면서 예전, 혹은 지금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상황들이 정리됐고 정신치료에 대해 잘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우울은 불행한 감정과는 다르다. 우울은 불행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절망감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 색을 덧입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어렵게 만든다.p31


활동 수준이나 삶에 관여하는 정도는 우리의 기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동을 개선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p38


불안과 두려움을 같은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둘은 꼭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특정 자극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쉽게 말해 그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뚜렷하다. 반면, 불안은 신변에 뭔가 위험이 느껴지지만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다. 불쾌한 감각이 몸에 느껴지고 일상적인 일들이 걱정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안의 대상은 우리가 아직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아직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p42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려면 먼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 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p72


불안이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의 징후라면, 우울증은 두려움이 현실이 될 때 나타난다.p100


틀어진 계획_삶이라는 열차가 탈선하여 내달리는 그 혼돈의 순간에는 때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앞으로 무엇을 바꾸면서 살아야 할지, 그리고 자신을 옥죄는 자신과 남들의 기대는 온당한 것인지, 너무 늦기 전에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다. 그런 의문에 답할 수 있다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목표는 이룰 가능성이 더 높은 법이다. p109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라는 글에서 우울증과 애통함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해소하지 못하면, 망자의 심상이 우리 자신의 ‘자아’와 융합되어버린다. 그리고 분노가 내면화되어 이 새롭게 변화된 ‘자아’를 향하게 되면 우울증이 찾아온다고 했다.p253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애도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이지만, 우울증은 그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p254


우울증은 대단히 개인적인 병이다. 벌레가 사과 속을 파고들 듯 우리 영혼 속을 파고들어 자아정체감을 좀먹고, 살아갈 이유를 빼앗아간다. 우울증의 해악을 다스릴 방법은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p290


여러 사례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받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며,  우울증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며 먼저 용기를 낸 저자가 있기에 세상은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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