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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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출간한 이희영 작가의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를 읽었다.
책 표지에 오렌지색 바탕의 교실이 그려져 있다. 초여름 바람에 날리는 커튼이 있는 창가에 한 소년이 바깥을 보고 있다. 소년의 눈길이 닿는 곳에 동화같은 집과 정원이 보이고 잔디 위에 여학생이 서 있다.(책을 다 읽고 나니, 여학생이 서 있는 그 집이 가우디 속의 그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살면서 ‘아차’하는 순간이 있다. 혹은 후회할 일이 생기리라는 예상 속에서도 멈추지 못하는 순간.
선우혁의 고등학교 입학. 집에서 가까우니 굳이 다른 학교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지만, 그와 많이 닮아 13년 차이나는 쌍둥이라고 불리던 형이 다녔던 학교를 선택했을 때, 부모님은 온전히 기뻐해주지 못했다. 형이 졸업하지 못한 학교. 십여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의 공간에서 혁의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입학 후, 혁은 형의 담임선생님, 메타버스 속의 곰솔, 형의 친구 등을 통해 형을 만나간다.
혁에게 형은 다섯 살 동생을 잘 돌봐주는 든든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형의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은 형의 다른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다양한 지위와 역할, 상황 속에서 내가 드러내는 나의 모습 또한 다르게 펼쳐진다.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 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소설에서는 십대의 아이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과 학교라는 집합적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가 잘 그려져 있다.
“학교는 용광로와 비슷해…용광로는 여전한데 그 안에 정말 다양한 것들이 들어가거든.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틀을 가지고 뜨거운 쇳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지. 이렇듯 다양성이 존중되는 학교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바로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그와 비례해 점점 더 과장되는 말들. 이건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내가 있는 곳은 말이야, 수업 시간에 반 아이들 삼분의 일만 잠들어도 오늘은 성공했어. 기뻐하는 지독한 현실이야. 복도를 걸으면 ‘샘, 안녕하세요’ 사방에서 인사가 날아오는데 ‘어, 그래, 안…..’ 말할 땐 이미 나를 스쳐 지난 후지.“
소문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왜곡. 형과 곰솔과의 관계 역시 그랬다. 소문을 대하는 아이들의 반응은 불량식품을 먹는 모습 같았다. ‘원료가 뭔지, 어떤 성분이 들어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소문의 진실이나 개연성 따위는 사탕 껍질처럼 쉽게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결국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이다.
선우진과 곰솔의 관계는 소문을 다루는 학교의 방식 안에서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둘 만의 관계가 되었고 둘은 서로를 통해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을 쌓아간다.
형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혁은 시간이 흘렀다고 모든 것이 마모되는 것이 아니고 나무에 나이테가 세월이 지날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처럼 추억과 사랑과 그리움이 남는다는 것을 알아간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한 사람의 존재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가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회적 참사를 겪으면서 나온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의 의미가 글을 읽으면서 크게 다가왔다..
좋아하던 겨울과 귤 사이에 끼워든 진의 사고 때문에 겨울도 귤도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곰솔이 한쪽 면만 조각된 부조 너머 형의 모습을 알아가는 동생 혁으로부터 여름의 귤을 선물받는다.
“고마워”
기억과 애도, 따뜻한 위로 그리고 성장.
청소년 소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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